<파생공간>n 젊은이들의 염원

<Hyper-Space>n The desire of young people





미술계는 계속해서 굴러간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관장자리는 유보되고, 시립미술관은 지드래곤과의 혐업전시로 많은 이야기들(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을 만들어내고, 유수의 갤러리와 미술관에서는 기획적, 개인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거대한 흐름은 미술잡지나 미술정보웹사이트에 의해 전달된다. 그런데 이런 메인스트림 밖에 어떤 ‘염원’들이 꿈틀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서울시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신생공간’이다.


신생공간 중 하나인 ‘교역소’에서 이루어진 <2014 안녕>과 <미술생산자모임>과 같은 행사에서 신생공간을 운영하는 운영자 및 젊은 예술가들은 자기들의 의견을 한데 모으고 자신들만의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이 공간들과 사람들은 서울시 각 지역에 산발적으로 퍼져있다. 신생공간들을 80, 90년대 젊은 예술가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공간들이다. 단순한 흐름이라고 보기에는 그 형국이 사뭇 남다르다. 90년대생에 미술이론을 공부하고자 노력하는 필자도 이런 공간들에 자연스레 끌렸고, 몇개의 행사와 전시를 관람하며 이런 공간들에 대한 글을 써보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이 글의 목적은 이런 공간들에 대한 세세한 정의와 규정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또 어떻게 이런 공간들이 구성되었는지 어떻게 행사와 전시를 하고 있는지를 알리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공간들이 어떤 합집합을 형성하는지에 대해 소개하고, 이 공간들이 중요한 이유를 짚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이 공간들을 방문하고자 한다면 두가지 관점을 중점에 두고 가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첫 번재는 이 공간이 꼭 그 물리적인 외양 이외에도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두 번째는 지속가능성을 담보하지 않는 젊은 신생 공간이 사라져버리면 도대체 무슨 가치가 남을까? 이 글은 이 두가지 문제에 대해 속시원하지 않지만 답을 내려줄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더니즘도 포스트 모더니즘도 아닌 메타공간


미술을 한다는 것은 ‘전시’의 형태로든 다른 어떤 것이든 ‘작업’을 공개하는데서 증명된다. 하지만 미술계 제도내에서 대학을 나온 수많은 작가들이 모두 공평한 기회를 가지기 힘든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경쟁체계로 순환되는 제도 때문이다. 갤러리와 미술관에서는 더 좋은 작가를 찾기 위한 경쟁을 시킬 수 밖에 없다고 항변할것이다. 그 말도 무조건 틀렸다고 할 순 없다. 중요한것은 ‘기회’의 제공 측면에서 그런 공간의 대안책으로 나온 ‘대안공간’들도 같은 증후군에 빠져버린 것이다. 따라서 젊은 예술가들의 기회는 협소해질 수 밖에 없었고, 한 번 물꼬를 튼 작가들은 계속해서 그 물길을 키우지만, 그러지 못한 작가들의 마음에는 가뭄이 들어 쩍쩍갈라지기 일수였다. 하지만 2014년 이후 젊은 작가들은 그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다못해 비구름을 만드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신생공간’의 출현이며 내가 제목에 ‘젊은이들의 염원’이라고 적은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염원’이라고 말하니 어감이 굉장히 강하지만 젊은이들의 예술가로서의 자가증명에 대한 목마름은 ‘염원’이상일지도 모를일이다. 


유수의 갤러리와 미술관의 공간개념은 ‘소유’의 개념이다. 하지만 우리세대에게 익숙한 부동산 개념이란 ‘임대’일뿐이다. 알다시피 젊은 시절에 어떤 공간을 소유한다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일 것이다. 젊은이들은 작업공개에 대한 염원과 ‘공간’에 대한 필요성을 ‘임대’ 형식으로 해결한다. 임대란 큰 돈 보다는 보증금과 월세만 준비하면 되기에 여러명의 모임으로도 공간을 구하는게 상대적으로 쉬워진다.(물론 여전히 젊은 세대에게 한 공간을 임대한다는 것은 부담일수밖에 없다.) 


‘임대’한 공간들은 모더니즘 시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위해 구성된 ‘화이트 큐브’ 그리고 미디어아트를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해 등장한 ‘블랙큐브’와 다른 공간들이다. 이 공간은 실험실처럼 실패와 성공 모두 의미있는 것으로 간주되며, 완성된 예술이 아닌 만들어가는 과정의 예술을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공간을 기존 논리와 같이 ‘큐브’화 시키는 것이 의미없는 것은 당연지사다. 왜냐면 이런 젊은 세대들의 공간 구성법과 작업 방식은 이전 세대의 ‘미학’과 다르기 때문이다. 신생공간들은 혁신의 행동을 취하지 않고, 천재성의 논리를 아직도 추구하는 모더니즘의 유령들과 다르다. 그들이 색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동안 메인스트림 예술계에 반입되지 못하던 불순물같은 예술의 갈래들이 재해석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의 예술실험은 과거에 중심부로 편입되지 못한 요소들이 현대에서 자신을 향수하는 방식으로 해석된다.


2009년 ‘공간 사일삼’의 시작이래 현재까지 신생공간들은 하나 둘 두각을 드러냈다. 특히나 중요한 것은 단발적인 행사와 공간이 없이 이루어진 것도 많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임대’의 특징만큼이나 두드러지는 신생공간들의 특색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헤쳐! 모여!’의 전략으로 움직인다. 이들은 하나의 영속된 장소에서 작업을 풀어내지 않는다. 다만 자신들의 어떤 예술적 성취를 위한 ‘해프닝’을 해소하는 곳에 다름아니다. 고도의 숭고함, 미학적 성취와 같은 것이 아니라 이들의 행사는 ‘노는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인터넷의 무한한 정보제공과 함께 젊은 세대들은 게임, 애니, 만화와 같은 ‘서브컬쳐’로 지정된 것들을 거리낌 없이 향유한다. 오타쿠, 짤방, 키치, 캠프와 같은 것들은 구세대의 논리처럼 저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당연한 행동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이런 하위문화는 더 이상 ‘하위’가 아니다. 계속되는 무한반복의 문화는 그들을 등질적이고 평평한 문화로 탈바꿈 시켰고 젊은 세대 모두에게 공유되는 거대한 감정의 흐름을 만든다. 물론 세대에 따라 그것의 기준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요즘의 ‘하위문화’는 기존의 취급과 사뭇 다르다. 


작가들도 역시 하위문화의 분류에 속하던 것을 미술로 차용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위에 말한 ‘불순물’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이것을 모더니스트들을 공격하는데 사용했다면 오늘날의 젊은 작가들은 단지 차용할 수 있는 여러가지 요소 중 하나로 대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도 고민도 여기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표현되는 방식의 문제일 뿐이고, 차용, 편집의 논리로 ‘복제성’을 더 강화시키고 빠르고, 일시적인 예술로 표출하는 것이다. 


미술계의 메인스트림에서도 이런 하위문화의 유입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까지도 체화된 것으로 나타나진 않는다. 그러나 ‘신생공간’은 이런 작업들을 보여주기 가장 적절한 곳이다. 중심부에 속하지 않으면 잘라내던 ‘모더니즘’과 모든것을 중심부로 바꾸려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은 결과적으로 등질하다. 때문에 이들의 움직임은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모더니즘’을 빼기한 결과로 보인다. 탈모더니즘의 장막 아래 가려진 모더니즘이 더 이상 이 세대에게 작동하지 않는다. ism의 상실은 예술적 완벽성을 소실을 말한다. 오히려 그 지점에서 빈틈의 미학이 가치를 가진다. 그런데 엮는자의 아카이빙에 의하면 2015년 6월 25일 기준 약 26곳의 신생공간이 존재한다. 왜 이렇게 많은 공간이 1년 사이에 빠르게 생성되었을까? 무엇이 이들 공간을 계속해서 생성하게 하는가? 단순히 젊은이들의 염원의 교차때문으로 보기에는 그 가속도가 매섭다.




사진 출처 : 엮는자 블로그



<파생공간>n


앞의 글에서는 신생공간들의 간단한 개념에 대한 설명을 적었다. 무엇보다 이런 공간들은 ‘작가’들의 변화에서 수반된 현상이라는 점이 두드러진다. 그렇다면 이제 이 공간들이 어떻게 빠르게 전파되었으며, 그 형국이 어떤 것인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신생공간은 젊은이들의 작업공개에 대한 시간단축과 공간적 필요성에 의해서 매섭게 생성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단시간에 많은 공간을 생성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공간들이 ‘탈공간성’의 논리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나는 ‘파생공간’이라는 다소 낯선 용어를 주장하고 싶다. 보드리야르의 ‘파생실재’ 개념에서 착안한 ‘파생공간’이라는 단어는 이 ‘공간’이 탈물리적, 탈형이상학적인 공간임을 시사한다.


“파생실재는 가장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실재가 가지고 있는 사실성에 의해서 규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파생실재는 예쩐의 실재 이상으로 우리의 곁에 있으며 과거 실재가 담당하였던 역할을 갈취하고 있기에 실재로서, 실재가 아닌 다른 실재로서 취급하여야 한다.” 여기까지가 ‘파생실재'에 대한 간단한 정의다. ‘파생공간’이란 그럼 어떤 것인가? 이 공간은 ‘가장’이다. 기존의 예술이 담보하는 공간성의 거대담론이 비어버린 것을 감추는 곳이다. 하지만 이 ‘파생공간’들은 예전의 공간만큼이나 우리 곁에 산발적으로 존재한다. 게다가 예전의 공간이 실천하지 못한 계획들을 실행하고, 그 공간이 포기한 역할을 가로챈다. 때문에 우리는 이 ‘파생공간’을 이전 시대의 ‘전통공간’과 다르게 보아야 한다.


글의 제목에서 내가 파생공간이라는 단어 옆에 붙인 ’n'은 무한대를 이야기한다. 이것의 의미는 공간적으로 무한한것이 아니다. 그것은 ‘탈공간적’인 의미에서 무한하다. 신생공간들에 대한 많은 의견들 중 합의점은 그것이 ‘공간’의 논리로 작동하는것이 아니라 작가들이 공개하려하는 ‘시간’의 문제라는 것인데, 이 ‘시간’의 문제에서 ‘공간’은 다른 논리로 확장된다. 여기서 공간은 ‘관념’속에 있는 것으로 바뀌며, 젊은 세대에게 익숙한 ‘인터넷’의 체계와 닮는다. 그러니까 파생공간을 운영하고 그곳에서 전시하는 작가들의 활동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체계인 것이다. 왜냐면 그것에 어떤 정확한 프레임이 없기 때문이다. 프레임이 없다는 것은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장소에선 수평적으로 무한하게 작가들을 나열한다.


파생공간들은 자신의 공간적 특수성에 귀속되지 않고, 주변환경과 조화되며,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행사와 참여되는 작가, 작업에 더 긴밀하게 작동한다. 물론 장소특수성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그것이 최우선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젊은이들의 공통된 관념은 그것을 구체화하는 구성원에 따라서 각각 다른 물리적 공간의 제한된 형태로 구현되지만 본질적으로 아주 닮아있다. 따라서 그들은 본능적으로 서로 뭉치려고 한다.


공간은 일종의 기호처럼 변환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원론적 기호학으로 이야기하자면 기표(=물리적 공간), 기의(=공간에 대한 관념)이 되는 것이다. 기의는 동일하지만 운영자들은 기표를 선택적으로 운영한다. 괄목할만한 점은 이들이 전시, 스크리닝, 퍼포먼스와 같이 다양한 방식을 통해 혼성적인 작업을 공개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현대미술의 흐름에서 그렇게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이 경우에는 이 신생공간에서 보여주고 전시하는 작가들이 쉽게 겹친다는 것과 서로 서로 영향을 미치게 주목해야한다. 그들은 경쟁하지 않으며 공간에 대한 지속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작업안에 내재된다. 유목민처럼 개방된 공간들(임대기간의 끝과 새로운 시작)을 떠다닌다.


‘파생공간’은 ‘시뮬라크르’로서의 공간들의 연속체이다. 여기서 실제 공간적 특징은 단순히 물리적 한계에 지나지 않으며, 공간의 원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짐을 풀어놓듯 어떤 공간에서든지 작가들은 작업을 토해낼 수 있다. 그렇게 되었을때 선발된 공간들은 작가들의 ‘디세뇨’에 압도된다. 공간에 작업을 맞추는 장소특정적인 것이 아니라 작업이 공간 어디에나 침투할 수 있게 형성되는 것으로 바뀐다. 이를테면 ‘작가특정적'으로 말이다. 이때의 작업은 복제되고, 가볍고, 빠르고, 일시적인 것들이 다수를 형성할 수 밖에 없다. ‘권시우’씨는 이를 ‘키트화’된 전시공간 개념으로 해석한다.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나 역시 이런 공간을 보면서 ‘키트’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만 나는 작가들의 작업에 그 초점을 맞췄다. 언제든지 짐을 옮기듯이 적용가능한 공간들은 어떤 권력을 생성하기 보다는 수평적으로 정체되기 때문에 불안하고 긴장감있는 감정들을 자아낸다.


기존의 미술계의 공간들과 ‘파생공간’의 차이점을 되짚어보도록 하자. 기존의 공간이 공간의 거대한 ‘특수성’을 상정하며, 그 공간이 가지는 ‘가치’를 ‘건축적’인 디자인과 설계로 표방하려고 하는 것과 달리 ‘파생공간’은 ‘임대’를 통한 공간의 출입을 실행하기 때문에 그 공간의 ‘건축적’이고 ‘디자인’적인 어떤 부분과도 연관짓지 않는다. 공간의 물리적 특징은 비어버린 것이 된다. 따라서 공간의 물리적인 역할이 관념에 압도된다. 또한 기존의 공간들이 자신들의 공간을 대표할 수 있는 명확한 목표에 의해 작가들을 선별하고 경쟁시켜 제시하는 것과 달리 ‘파생공간’들은 어떤 공간의 정의도, 경쟁도 존재하지 않는다. 개별 공간의 간단한 정의 이외에는 모두가 열린 기획, 실험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존의 공간들은 자신들의 ‘심볼’이 공간을 압도하지 못하지만, ‘파생공간’들은 ‘심볼’이 공간을 압도한다. 공간에 대한 경험보다는 가상의 데이터로 혹은 실제의 물질인 스티커와 같이 복제된 ‘심볼’들은 여기저기 달라붙는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공간으로 찾아오게 만든다. 나는 이 ‘심볼’들이 주는 의미가 남다르게 생각된다.






각각 800/40, 지금여기Now here, 교역소 로고



파생공간들은 결론을 내리려고 하지 않고, 정의 자체를 도태시킨다. 얼핏 이 시뮬라크르들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닐까 걱정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뮬라크르들은 권력적인 장소의 사라짐을 감추기 위해 물리적 공간을 상정한다. 이 파생공간들은 죽음을 담보로 한다. 임대기간이라는 한정적 기간 때문에 파생공간들의 행사와 전시는 일종의 ‘해프닝’과 같다. 그들은 삶을 살아가듯 예술한다. 예술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예술이다. 그들의 전시공간은 어딘가 특별한 다른 장소가 아니라 즐기기 위한 곳이다. 그리고 즐기기 위해 공간이 채워질때 작품을 제작하고 전시하는 작가들과 관람자의 구조가 수평적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능동적 관람객이 탄생한다.


능동적 관람객의 출현


현대미술의 메인스트림은 과거처럼 거대한 ism이나 선언문에 기대지 않는다. 비엔날레나 국내외 유수의 미술관의 어떤 전시에 참여했는가가 ‘작가’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탈권력화했다고 착각된 현대미술에서도 여전히 권력구조는 존재한다. 여기서 파생공간들은 그런 권력을 평평하게 만든다. 이곳에서 전시하는 작가들의 전략도 전혀 권력적이지 않다. 삶의 태도에 지나치게 방관적으로 비출 수 있지만 이렇게 방관하는 방식의 작업과 구성들은 ‘능동적 관람객’에 의해 새로운 의미의 탄생가능성을 부여받는다.


능동적 관람객이 출현하게 된 계기는 ‘파생공간’들의 작동방식에 따른 것이다. 단적으로 설명하자면 우리는 전시를 볼 때 전혀 능동적이지 못하다. 전시장의 기획단계에서는 작업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다양한 매체들이 논의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매체들(비평, 인터뷰)을 접하고 나서 작업을 마주한다. 이런 매체들은 당연히 우리의 인식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파생공간’들은 이런 매체들을 최소화하거나 제공하지 않는다. 그렇다 불친절하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더 자유로운 인식을 돕게 한다. 기존의 전시 매커니즘이 ‘능동적’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여기서 진정 능동적인 관람이 실현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점은 잘못된 인식이 발생하기 쉽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잘못된 인식이 발생하기위해서는 작가의 강력한 주장이 필요하다. 허나 작가들은 신생공간에서 자기이념의 주장보다는 관심있는 주제에 대한 ‘아카이빙’ 혹은 ‘소개하기’와 같은 작업들을 다수 보여준다. 따라서 작가들은 권위있는 원본성을 가진 ‘예술품’을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과 같은 맥락에서의 ‘작가의 죽음’ 뒤에 태어난 ‘텍스트’ 조작의 결과물을 제공하는 것이다. 관람자들은 더 이상 미적 특성을 수동적으로 볼 의무를 가지지 않는다.


교역소의 <수정사항> 행사를 예로 들어보자. 이 행사에서는 관련된 모든 이를 ‘참여자’로 규정한다. 단지 ‘플레이어’ - ‘비 플레이어’의 차이점만 드러난다. 여기서 플레이어란 어떻게든 자신의 작업물을 공개하는 자들, 비 플레이어는 그 작업물을 감상하는 자들이다. ‘플레이어’도 자신에게 할당된 시간 이후에는 ‘비플레이어’로 전환된다. 당연히 여기서 둘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이 행사는 즐기러 오는 곳이라는 인상을 준다. 문화적 여가생활로 선택되어 감수성을 제공받기를 원하는 기존 관람객과 달리 참여자들은 행사와 전시를 그 자체로 즐긴다. 모든 순서를 지켜서 관람하지도 않는다. 원하는 것을 보고, 쉬고, 잠을 잔다.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예술을 즐기는 자를 위한 예술’이 성행한다. 


능동적인 관람객들은 인터넷의 발전에도 관련이 있다. 그들은 트위터, 페이스북에 올라온 ‘파생공간’에 대한 감상평(짧던 길던)을 볼 것이고, 그 공간에 대한 궁금증이 발생했을 때 자신의 관심과 합치한다면 공간의 위치를 검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미술이 전시되는 것으로 쉽게 예상되는 거리가 아닌 산발적으로 퍼져있는 공간들을 찾아가게 된다. 파생공간 인지 -> 궁금증 -> 위치 검색 -> 방문이라는 행위가 인터넷이 없었다면 빠르게 일어나지 못했을 것임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파생공간’들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언제든지 관람객이 이 공간들에서 새로운 기획이나 전시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는 것이다. 이들은 심사하지 않고, 경쟁시키지 않는다. 보통 관람객은 그 공간에 제시되는 전시를 감상하고, 짧은 리뷰를 쓴다거나, 서로 이야기할 뿐이다. 하지만 이 공간에서는 누구든지 새로운 기획을 제시하고, 새로운 행사를 제시하고,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다. 다만 아직은 크게 활성화되지 못할 뿐이다. 예술의 권력적 이면에 따라 주입되는 미학적 가치들이 사라졌을때 나타난 것은 표면에 넓게 퍼진 가치들이고, 이제 관람객들은 이 가치들을 넘어다닌다. 


작업의 기호화만큼이나 파생공간의 기호적 특징은 각 관람객 개별자에게 유동적으로 번역된다. 따라서 비 결정적이다. 규정불가의 상태에 놓임으로써 비평가와, 큐레이터같은 매개자의 개입여지도 좁아진다. 글쓰기에 있어서도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 판단하는 작업보다는 이런 ‘파생공간’의 여러 현상들을 파악하고 진단하는 작업만이 기능한다. 매개자들은 ‘파생공간’ 속에 산재하는 작가들을 건져올려 메인스트림 미술계로 낚아올릴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이 ‘파생공간’ 속에서 활동하는 작가들도 메인스트림으로 이동하는 것이 궁극적인 바람일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메인스트림으로 가는 길을 스스로 확장함으로써 신선한 공기를 유입시키는 것이 ‘파생공간’의 의의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어떤이들은 이 공간들이 곧 파산할 것이며, 단발적인 효과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 사실이다. 이 공간들은 일시적일 수 밖에 없고, 죽음을 담보에 두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작업 전반이 무의미한 것으로 기화되지 않는다. 이 움직임 자체는 미술계라는 좁지만 거대한 시스템안에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행위이다. 또한 ‘관람객’들에게 능동적으로 움직여 미술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결론


‘임대’라는 익숙한 공간 점유의 방법과 중심부에 쉽게 편입되지 않는 여러가지 실험들의 요소가 하나로 겹치면서 작가들과 기획자들은 경쟁없이 작업을 풀어놓을 수 있는 공간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신생공간’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들은 ‘해프닝’의 과정을 여러 예술형식을 공개한다. 또한 하위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복제와 차용이라는 동시대미술의 두드러지는 특징도 담보한다. 그들이 생성해낸 ‘신생공간’들을 나는 이 글에서 ‘파생공간’이라고 명명해보았다. 이 공간들은 탈물리적이기 때문에 무한한 확장의 가능성을 가진다. 작품을 공개하는 시간의 압축을 위한 공간설정과 기획의 틀의 부재때문에 안정적이지 못한 이 장소들은 수평적으로 평평해진다.이 공간들은 짐을 풀고 쉬어갈 수 있는 일종의 쉼터와 같다. 작가들은 자기 짐을 제 멋대로 풀어낸다. 이 ‘공간’을 대하는 관람객의 입장도 능동적으로 바뀌었다. 기존에는 ‘능동적’으로 착각되어온 개념들이 기실 ‘능동적’이게 되었다. ‘파생공간’의 빠른 추가발생과 관람객들의 능동적 관람 사이에는 인터넷과 모바일이라는 편리한 시스템의 공조가 한 몫 했다. ‘파생공간’ 속에서 아무 의미없는 전개들이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일민미술관에서 7월 3일부터 새로 전시하는 ‘뉴 스킨 NEW SKIN’전은 새로운 감각을 가진 예술가들을 소개하는 자리라고 한다. 여기서 ‘새로운 감각'에 속하는 작가중에 ‘파생공간’을 운영하고, 그 곳에서 전시하는 작가들이 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인가? 작가들의 미술계 작동방법은 메인스트림 밖에 새롭게 꾸려졌다. 여러 공간들은 언젠가 문을 닫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터져버린 댐은 다시 막히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공간은 계속해서 발생할 것이고, 단발성 행사도 이루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리해보자면 ‘젊은이들의 염원’은 파생(신생)공간의 조직으로 이어졌고, 그 지점에서 ‘능동적 관람객’이 출현했다는 것이 이 글의 주장이다. 다소 두서없고, 명확하지 않은 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글은 이런 공간을 대하는 필자의 견해일 뿐이라는 점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나는 이 공간들을 즐기고 싶다. 글을 쓰는 나의 염원(어딘가에 글이 게재되기를 바라는 소망)은 해소되지 않았기에 그들의 자발적 행동을 부러워하는 것은 아닐까? 아무쪼록 여러분도 꼭 ‘파생공간’들을 방문해보시길 바란다. 그리고 단지 즐기자!


by. 하마


P.S 

개별공간들을 찾아보고 싶다면 ‘엮는자’의 사이트가 도움이 될 것이다. 주소 : http://blog.naver.com/herberer


참고 텍스트


 장 보드리야르, 하태완 역, 시뮬라시옹, 민음사, 2001


윤난지, 현대미술의 풍경, 한길아트, 2005


니문, 인디언밥 게재, Next is what? (or where?), http://indienbob.tistory.com/913


권시우, 집단오찬 게재, 공간(들)의 파산, 통로로써의 ‘던전’, http://jipdanochan.com/54


강정석, 반지하 사이트 게재, 서울의 인스턴스 던전들, http://vanziha.tumblr.com/tagged/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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