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벨 그로 Isabelle Graw


이 글에서 그로우는 회화를 ‘매체 개념’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매체 비특정성, 지표성 그리고 가치에 대한 관점으로 재사유한다. 매체 비특정성을 위해서 저자는 무엇보다 회화가 더 이상 캔버스와 종이를 비롯한 이미지 운반체(Bildträger)위에 그려진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기호 제작의 한 형식’으로 대체된다고 주장한다. 더 구체적으로 여기서 저자가 서술하는 것은 결국 예술가-존재의 부재가 회화라는 기호 제작 형식을 통해 ‘연상 작용’으로 나타나며 바로 이 부재의 자리에서 재차 회화 자신의 유사-주체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성이 바로 회화적 지표성으로 서술된다. 지표성을 통해서 인간 노동-활동의 가치(이른바 주체)가 비로소 회화라는 기호제작 형식(유사-주체)으로 전이되고 그것의 물질적 현존이 바로 이미지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회화는 ‘물질성’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이의 인간성’에 연관된다. 이러한 사유는 회화의 원본성, 일회성을 물질적 관점이 아니라 창작 과정의 일환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수 많은 뉴-미디어가 회화의 역할을 이어받은 시점에서 여전히 회화 자신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가치를 보존하려는 개념의 재정의로 보인다. 회화가 더 이상 매체가 아니고 '부재를 통해 인간성의 존재를 연상시키는 기호 제작'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매체성의 속박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해석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저자의 이러한 매체-해체작업은 매체 혹은 말 그대로 이미지를 투사하는 지지체를 염두하지 않은 채 생산과정 밖에서 작업하는 이론가 중심적인 견해이기도 하다.

 

저자가 중심으로 삼는 '매체 비특정성', '지표성' 그리고 '가치'라는 관점에서 중요한 문장들을 발췌해 아래에 적어 놓았다.


“나는 회화를 창작자의 부재한 인간성의 존재를 연상시키는 특별한 능력을 보유한 기호제작의 형식으로 정의할 것을 제안한다.”
“다르게 말해, 회화를 그 생상물에 주관적 특성을, 아니면 심지어 유사 주체의 특성을 부여하는 기호-만들기의 과정으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예술가의 삶과 인간성의 직접적인 움켜쥠이 가능해진다.”
“예술 작업을 산 이는 극단적으로 말해 사람을 산 것이다.”
“미디어의 순수성은 1960년 이후에 이미 시험대에 올랐고, 오래전부터 회화적 실천들에 의해 이의제기되어왔다.”
“내 제안은 우리가 그러한 경향적으로 실제론적인 미디어의 개념을 뒤에 두고 회화를 발화되어진 개인화되는 것으로 경험하게 하는 기호생산의 형식으로 정의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생산물과 예술가의 부재하는 인간성 사이의 엮임을 질기게 묶으려 하는 기호의 지표성과 연관된 문제다.”
“회화는 부재하는 예술가-주체를 그 안에 나타내는 ‘연상’을 통해 생존한다.”
“부재 혹은 존재를 흔적의 측면에서 강조하던 아니던 상관없이 그것은 항상 그러한 부/존재를 운반하는 정신적 현존이다. 그리고 예술가가 자신의 필치를 부정하려 할 수록 이러한 부정이 그의 필치가 된다. 이것은 모든 반-주체적 실천들에 유효하다.”
“예술가-주체의 권위를 다양한 반-주체적 과정들로 잠식하려한 무수한 전후의 시도들은 예술가-주체를 뒷문으로 다시 들어오게 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예술가가 스스로를 지우려고 하는 시도들 안에서 이미지는 주체성을 부여받는다. 그것은 마치 회화 스스로 그려진 것으로 보이게 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회화와 지표성을 겹쳐보는 것은 근본적으로 예술가적 작업과 예술가의 진정한 주체 사이에 위치한 틈을 결코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에게 지표적 회화의 기호 안에서 드러나는 것은 예술가의 진정한 주체는 아닌데, 지표로서 이 기호들은 오히려 부재한 예술가의 존재의 연상을 생성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회화는 유사-현존의 인상이 ‘작용’으로 생성될 수 있는 수사적 수단, 정확히 말해 트릭들의 일렬을 보유한 세세히 분화된 언어이다.”
“한 편으로 맑스는 관계적, 환유적인 가치의 성격을 가치가 본질을 가지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곳에 위치한다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상품 자체는 가치가 크지 않은데, 왜냐면 가치란 “진정으로 사회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맑스는 그러나 또한 계속해서 가치가 단순히 ‘인간 노동’ 보다는 그 노동의 지출임을 묘사했다. 이는 곧 가치가 분명한 인간노동을 근본적으로 드러내주며 그것이 그 자신의 반대항으로 되돌아감을 뜻한다.- 이를테면 추상적인 인간-노동으로. 여기서 나는 회화가 가치가 어쨌든 명백히 구체적 인간의 노동에 근거하는 마지막 장소라고 여긴다.”
“회화의 능력은 그것이 생산자의 삶의시간을 통해 풍부해진다는 인상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 생산자는 회화를 가치전도를 위한 이상적 후보자로 만든다. 회화는 “삶”에 흠뻑 젖고, 바로 이 점이 그것을 오늘날 여전히 대체불가능하게 한다.”

Jörg Immendorff, Hört auf zu malen, 1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