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공유지로서의 

신생공간 ‘노드’ 혹은 ‘대안공간 2.0’





나는 ‘파생공간n 젊은이들의 염원’이라는 글을 통해 신생공간을 ‘파생공간’으로 정의하고자했다. 당시의 나는 기존 제도권 밖(안?)에 생겨난 신생 미술계를 부족한 글솜씨로나마 맥락화하려고 시도했다. 이어서 이들의 세부적인 역학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들의 활동영역은 인터넷 체계의 모습과 닮아있다. 내 SNS의 타임라인에는 전시 소식들이 넘쳐난다. 특히나 ‘신생공간’의 전시와 행사가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 기존 매체에서 홍보되기 어려운 자생적 기획 자체가 ‘웹’ 시스템에 적응해가고 있다. 그렇다면 인터넷 용어를 사용해서 이들을 설명해볼 수 있을테다. 이 글은 ‘데이비드 조슬릿’이 ‘라운드 테이블’에 기고한 ‘개념미술2.0’에서 사용한 ‘노드’와 ‘네트’개념에서 출발한다. ’조슬릿’은 ‘노드’와 ‘네트’를 ‘개념미술’ 작업에 한정적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나는 ‘노드’와 ‘네트’를 ‘신생공간’을 설명하기 위해 전시공간으로 확장시켜 사용할것이다. 원래의 뜻과 달라진 비평용어는 어쩌면 ‘신생공간’의 영역에서만 기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최소한의 담론 형성이 필요해보인다.


‘클라이언트’-‘노드’-‘네트’

우선 몇 가지 용어에 대한 정의를 제시하고 넘어가야겠다. 현재 미술계에서 존재하는 모든 개별자를 나는 ‘클라이언트’라고 부를 것이다. 이 단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개별 PC를 말한다. 즉, 어떤 체계를 사용하고 제시하는 최소한의 개별자다. 여기에는 생산자, 기획자, 수용자 모두 포함된다. ‘클라이언트’가 집단적으로 모이게 되면 일종의 ‘노드’를 형성한다. 노드는 네트워크의 기본 요소인 근거리 통신망(LAN)에 연결된 컴퓨터와 장비를 통틀어 지칭한다. 미학적 용어로 전환하면 공간의 기획과 행위에 가담하는 모든 생산자와 기획자, 수용자를 묶어주는 것이 ‘노드’이다.  ‘조슬릿’은 노드를 “다양한 이미지의 흐름을 중첩되고 흔히 충돌하는 양상으로 결합”하며 “광범위하다고”말한다. 내가 ‘조슬릿’의 담론에서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노드’가 ‘이미지 공유지’가 된다는 것이다. 이 곳은 모든 이미지-정보의 기획이 무제한적으로 수용되고 발신되는 곳이다. 노드는 무수히 많이 형성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곳의 이미지-정보와 그 기획은 반짝이듯 점멸한다.


‘노드’는 ‘오쿠이 엔위저’가 2002년 도쿠멘타 11에서 주장하고 실행한 ‘플랫폼’ 개념과 닮았다. ‘플랫폼’과 ‘노드’ 모두 일정 ‘이미지’를 다른 곳으로 보낼 수 있는 ‘교환지점’이다. 이 지점에서 신생공간과 그 곳의 기획과 작업물은 모두 ‘노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도 작업-이미지를 하나의 ‘노드’인 신생공간에서 개별 ‘클라이언트’에게 수용시키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교환한다. 가령 직접 정보를 제공하거나, ‘노드’안의 개별 ‘클라이언트-생산자’의 제공할 정보를 좀 더 광범위하게 수용되게 하기 위해 ‘네트’에 등록된다.


‘신생공간-노드’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서 시각예술을 삶의 형태로 제공한다. ‘신생공간-노드’는 작업 공개의 시간적 프로세스를 압축한다. 마찬가지로 그 후의 과정들도 압축된다. 이를 통해서 ‘신생공간-노드’는 ‘이미지 공유지’이자 동시에 ‘교환지점’으로 기능한다. 실제로 많은 ‘신생공간-노드’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을 미술관이나 갤러리 혹은 대안공간의 기획전시에서 선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획이 이루어지면 그 세부적인 정보들이 ‘네트’에 등재된다. 노드는 얼핏 ‘네트’의 하부구조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 주변을 도는 위성이다.


‘노드’는 ‘네트’의 최소 단위를 형성한다. ‘네트’는 무수하게 연결되어 있어 수신과 발신이 수없이 일어나는 ‘망網’이다. ‘네트’안에는 개별 ‘노드’에서 발신된 무수한 정보가 산재하고 있다. 하지만 인터넷 체계에서 정보는 무제한 적으로 유통되지 못한다. 예를들면 북한은 자국의 네트워크 망만을 사용하며, 중국 또한 여전히 인터넷 규제가 심하다. 대한민국에서도 법에 위배된 웹사이트는 차단되어 다른[‘http://warning.or.kr'] 주소로 자동접속된다. 이런 규제들은 우회로를 통해서 뚫을 수 있지만, 그것은 인터넷에 수많은 정보가 내재되어 있는 것만을 알려준다. 우리는 차등적으로 분배된 정보를 가장 먼저 접하게된다. 따라서 네트에는 정보가 내재되지만 그것은 시스템 자체가 정의하는 영역내에서만 기능한다. 네트는 자기표상을 위해서 이미지-정보를 선택적으로 분배해야한다. ‘네트’체계는 바로 기존의 미술계이다. 이들은 신생공간이 ‘노드’화 함으로써 ‘네트’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신생공간-노드’ 에서 작품공개까지의 시간적 제약이 완화되서 ‘네트’도 작업을 찾기가 쉬워졌다. 


앞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노드’는 ‘네트’로 자신의 이미지-정보를 발신한다. 이렇게 발신된 이미지-정보는 노드체계 내에서 직접 클라이언트와 상호교류를 맺기도 하며, 네트가 선별한 차등임무 기획에 따라 다소간 의미있어보이는 방식으로 수용되기도 한다. 클라이언트는 실제 컴퓨터와 다르게 개성적 존재(관람객)이기 때문에 ‘노드’ 혹은 ‘네트’에서 수용된 ‘이미지-정보’를 선택해서 수용할 수 있다.


‘신생공간-노드’는 공개하는 이미지-정보를 일종의 쿠키처럼 만든다. 쿠키란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고 났을 때 잔재하는 정보다. 재검색을 편리하게 만드는 쿠키는 어떤 정보에 검색권력을 실어준다. 쿠키로서의 이미지-정보는 일단 공개된 순간부터 전체 이미지-정보 관계망에서 관리된다. ‘노드’와 네트’의 관계에서 중점적인 것은 ‘순환고리’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계속해서 노드가 무제한 수용을 통해 이미지를 교환한다면, 네트는 그것을 차등정리한다고 밝히고 있다. 네트에 의해 규정된 이미지-정보는 다시 노드 혹은 클라이언트에게 수용된다. 노드는 네트에게 구획받고 동시에 네트는 노드에게 정보를 제공받는 고리가 형성된다. 이때 시각적 결과물은 어떻게든 적용할 수 있는 편집적 정보가 될 위험에 처한다. 네트를 통한 차등적 정보교환 모델은 ‘신생공간-노드’에서 능동적으로 이미지-정보를 추적하는 클라이언트들에게는 진부해진다.[각주:1]








대안공간2.0

I.T 개념에서 열린체계는 하나의 온전한 프로그램으로 기능하는 사용자 참여적인 형태로서 웹 2.0으로 나타난다.  I.T 용어에서 웹 2.0은 낡은 개념이다. 허나 웹 개념과 닮아가는 실제 미술계의 역학구조를 추적하기 위해 그 언어를 전환시킬때는 새로운 개념이 된다. 대안공간은 미술제도의 말 그대로 ‘대안’적인 모델로서 출현했다. 하지만 이 장소들도 결국 제도권의 변종 시스템으로 변했다. 제도권은 대안공간의 역할모델을 흡수함으로써 ‘대안’제도 자체를 종식시키는데 이르렀다. 이렇게 작가들에게 제공되는 대안책이 실상 무용지물이자 환영적인 체계일 뿐이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신생공간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게 되었다. 신생공간은 앞서 노드와 비교하며 설명했던 것 처럼 ‘이미지 공유지’로서 훌륭하게 ‘공개’의 대안적 모델로서 기능하려한다. 새로운 대안모델로서의 이들의 역할이 어떤 결말을 보일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개별 클라이언트들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신생공간-노드’는 대안공간 2.0으로 규정될 수 있다. 미술계 제도권의 기성공간들이 ‘신생공간-노드’를 끌어들일때는 각 개별 작가들을 선택적으로 기획전에 함유시킬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태생부터 기성공간과 신생공간이 체계를 달리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전략을 기성공간 내에서 재현한다는 것은 많은 오류를 발생시킨다.


신생공간의 역학구조를 추적하면서 주장한 인터넷 체계를 닮아가는 ‘미술계’는 사실 ‘인트라 넷’에 가깝다. ‘인트라 넷’은 ‘폐쇄적 근거리 통신망’으로 정의된다. 미술계라는 ‘네트’ 자체는 ‘폐쇄적’으로 작동한다. 아는 사람만 알고, 외부인은 그들의 기획에 심드렁하기 쉽다. 즉, 대중은 ‘네트’에서 분배한 ‘편집된 이미지-정보’마저도 지루해한다. 그런 상황에서 ‘네트’ 주변에 위성처럼 돌아다니는 ‘노드’들이 제대로 의미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까?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노드로 뭉쳐진 이미지 공유지의 운명이 그런 것일까? 이들은 제도권에 수혈되기만을 기다리며 작업 공개에 만족해야 할까? 제도권에 수용된 후에도 의미작용이 폐쇄적으로 공회전 하는 것은 아닐까? ‘신생공간-노드’들이 교환지점으로서의 특출난 수용, 발신모델을 가지고 ‘인트라넷’의 방화벽을 파괴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한다.


‘신생공간-노드’의 ‘교환지점’으로 기능하는 극단적 모델은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 모델은 바로 ‘엮는자’라는 가상 플랫폼이다. ‘엮는자’의 등장은 물리적으로 떨어지고,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신생공간-노드’를 병렬적으로 나열하는데 기여했다. ‘엮는자’는 ‘노드’자체를 교환하는 공유지로 기능한다. 기존의 네트워크 정보 플랫폼과 비교해보면 ‘엮는자’는 적극적인 광고나 홍보를 위해 움직이는것은 아니다. 그들의 아카이빙은 일련의 관계망을 상상하도록 돕는다. 또한 노드마저 네트를 거쳐서 서로를 인식할 위험을 최소화하고, 그들만의 거대 노드 집합체를 형성하여 ‘이미지-정보’가 활발하게 교류되도록 돕는다. 또한 ‘엮는자’의 플랫폼을 통해서 그들은 ‘관람자’에게 편리하게 다가선다.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신생공간-노드’의 정보를 취할 수 있다. ‘엮는자’는 ‘클라이언트’가 ‘노드’에 직접적으로 접속할 수 있는 모델이 된다. ‘인트라넷’으로 작동하던 ‘노드’ 예술계는 ‘엮는자’ 덕분에 ‘엑스트라넷’으로 변환된다. ‘엑스트라넷’은 외부 조직의 승인된 사용자에게 확장된 사설 인트라넷이다. 즉, 서로의 ‘인트라넷’을 연결함으로써 이동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다.


노드의 이미지 공유지로서의 특성은 위험부담과 자기모순을 부르기도한다. 그들의 이미지는 유령처럼 스쳐지나가는 것으로 취급될 수 있다. ‘신생공간-노드’는 ‘네트’에게만 자기 이미지를 과신한다. ‘노드’는 적극적으로 추적하는 클라이언트에게 다가선다. 탈공간적인 그들의 활동은 자기검열적이다. 따라서 이들의 태도는 소극적으로 비춰보인다. ‘신생공간-노드’의 행사들은 먼저공개하고서 수정해나가는 ‘오픈베타’형식으로 취급된다. 그 형식은 공개불가의 답답함과 무반응의 회의감을 없애줄 수 있다. ‘노드’는 소극적 태도에 대한 비난을 피할길이 없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대안책은 ‘협동’이다. 예전부터 함께 조직하는 행사는 많이 이루어졌지만, ‘신생공간’은 특히나 여럿이 모여 담론장을 형성해낸다. 이때는 ‘노드’가 하나의 ‘네트’ 처럼 보일 수 있는 거대한 체계로 뭉쳐진다. ‘신생공간-노드’는 각자의 기획을 보여주는 동시에 합동 기획을 통해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다.


신생공간이 공간적 제약에서 탈피한다는 것은 비엔날레같은 국제적 기획모델이 보여주는 효과와 비슷해보인다. 하지만 ‘신생공간-노드’의 유목적 특성은 거대기획과 다르게 소규모로 이루어진다. 이 기획은 작가의 시각적 영웅주의를 위해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 작가의 노동적 생존을 위한 ‘공연무대’처럼 기능한다. 이 공간은 기존 ‘네트’의 미학체계를 거스르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생산적인 담론을 형성할 수 있도록 ‘이미지-정보’를 끌어들였다. ‘노드’체계를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해 기획한 사례는 ‘굿-즈’다. 이 행사를 통해서 신생공간-노드는 자신들을 한 데 묶는데 성공했다. 또한 소비사회에서 예술이 기능할 수 있는 상품성을 다각적으로 드러낸다. 이때의 상품성은 ‘존 버거’가 말한 예술에 내재된 형용할 수 없는 ‘부’가 아니다. ‘굿-즈’에서 이미지는 실로 ‘공유’되기에 바빴다.


(서론을 반복하며) 신생미술계의 체계는 인터넷과 닮아가서 모바일 기기는 그들의 빠른 접속망을 형성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클라이언트들은 노드가 발신하는 정보를 개별적으로 수용하거나 무시하기에 편해졌다. 대안공간 2.0으로 기능하는 ‘노드’ 내부의 모든 클라이언트들의 자율적 활동은 열려있다. 탈공간적 세계로 빠져드는 ‘파생공간’ 내지는 ‘신생공간’은 동시에 정보를 병렬적으로 나열하고 효과적으로 흡수되도록 만든다. 수용자의 문제는 이들이 제공하는 것을 어떻게 조합할지 고민하는 것이다. 2016년이 다가오는 지금 나에겐 신생공간들에 대한 걱정과 흥분이 교차한다. 이 글에서 주장한 ‘노드’와 ‘네트’ 그리고 ‘대안공간2.0’이라는 개념은 연결고리가 생소하거나 느슨할 수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신생공간’이라 불리는 가상적 ‘파생모델’이 지속적으로 깜빡거리는 것이다. 신생 공간 혹은 신생 미술계는 기성제도라는 돌에 부딪힌 계란이 될 운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돌의 표피에 달라붙어 살아남는 방법이 2015년에 목격한 ‘신생공간’ 현상으로 나타난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계란의 흰자와 노른자는 돌 속으로 흡수되어버린것은 아닐까?

by. 하마



참고 텍스트

〖라운드테이블 中 개념미술2.0-‘데이비드 조슬릿’〗 알렉산더 덤베이즈, 수잰 허드슨 엮음, 예경, 205~215p, 2015

〖기획노트〗, 굿-즈 기획팀, http://goods2015.com/


사진 출처

http://journal.kiso.or.kr/?p=2831





  1. 그러나 여전히 네트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기획들은 권력을 가진다. 또한, 네트세계에서 좀 더 거시적인 담론을 꾀하기가 쉽기 때문에 우리는 고개를 돌리고 노드만을 바라 볼 수 없다. 네트의 진부함은 ‘신생공간-노드’의 비결정성에서 나타나는 신선함과 대비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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