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것들을 모으다. 귀신, 간첩, 할머니 미디어 시티 서울 2014
흩어진 것들을 모으다
귀신, 간첩, 할머니
미디어 시티 서울 2014
2014 9.2 ~ 11.23
이번 미디어 시티 서울 2014의 ‘귀신’과 ‘간첩’ 그리고 ‘할머니’라는 주제는 나에게 어느하나도 친숙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나는 ‘귀신’을 미디어로 또 이미지로만 접할 수 있었다. 귀신을 상상해보아도 그것이 어떤 것일지 좀처럼 쉽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우리를 위험에 빠드릴 것만 같은 ‘귀鬼’보다는 영적인 존재 그 자체만 떠오르게 된다. 또 ‘간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간첩이라는 것을 나는 직접적으로 보거나 듣거나 할 수 없는 세대이다. 그 만큼 간첩이라는 것은 오히려 판타지속에만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 나에게 ‘할머니’에 대한 추억은 많지 않다. 기억나는 일이 하나도 없을만큼 할머니는 내 삶에서 무색했다. 이 세가지 키워드는 나에게는 직접적으로 와닿지 않는 것들이었다. 미디어 시티 서울을 보고 난 뒤 들었던 가장 큰 생각은 바로 우리 아시아의 문제를 들춰낸다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문제는 여러 갈래로 흩어져버린 아시아이다. 따라서 미디어 시티 서울 2014가 흩어진 것들을 모아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흩어진 것들의 예는 많다. ‘귀신’은 지나간 역사의 환영들이 아닐까? ‘간첩’은 분단현실에서 분명히 존재하지만 판타지와 같이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할머니’는 새 삶을 개척해나가는 젊은이들에게 무색한 존재가 아닐까? 전시를 보면서 이런 질문들이 계속되었다. 전시의 세 가지 키워드는 모두 현대에서는 도태되어진 것들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색한 것들이 ‘미술’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또한 그것이 단순히 한국 미술뿐만 아니라 여러 아시아 국가의 작업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고 싶었다. 이번 미디어 시티 서울 2014는 우리 시대 삶에서 그리고 나 개인에게서 너무나도 당연했기에 흩어지고 퇴색되어진 것들을 다시 모아 볼 수 있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영상작업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비엔날레라는 특성상 좀처럼 오래 집중하기는 힘들었다. 기나긴 영상은 눈을 지치게하고 집중력을 흐리게 했다. 하지만 분명 전시장 속에서도 내 눈을 빛나게 했던 작품들이 있었다. 또한 영상작업 이외의 다른 매체들도 의미를 더하는데에 충분한 작용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했다. 이번 비엔날레의 작업들은 전시의 키워드에 딱 맞춰진 작업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개별 작업들은 그것들의 의미를 넘어서서 다가오게 하는 것들도 많았다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이슈로 이야기 되는 것은 ‘양혜규’작가의 작업이었다. 전시장 1층 초입에 가장 눈에 띄게 보이는 양혜규 작가의 작업은 ‘방울’이 중심이 된 작업이었다. ‘방울’의 소리와 움직임을 잘 살린 작업이라고 생각되었다. 샤머니즘과 무속의 상징으로 나타나는 방울들은 일정한 형상으로 바뀌어서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방울이 마치 춤을 추는듯이 느껴지는 것은 아주 특이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전시공간 내에서 아주 불편한 문제가 있었다. 작품의 의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관람자가 직접 작품을 돌리고, 움직이고 소리를 내게 해야한다. 하지만 작품의 보호차원으로 직원들이 대신 작품을 돌리거나 이동해주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관람에 방해가 되었다. 분명히 우리의 몸으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남이 하는 것만 봐야하는 것, 그리고 완전히 돌아가야함에도 불구하고 반만 돌려서 보여주는 것은 ‘방울’이라는 것이 소리내며 움직이는 것을 통해 새로운 체험을 보여주는 이 작업에는 전혀 친절한 방법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양혜규 작가의 작품은 단지 지켜보는것 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리 나는 춤 Sonic Dances, 2013 소리 나는 돌림 타원 Sonic Rotating Ovals, 2013
근대성의 반성
익숙한것을 낯설게 보게 하다.
닐바 귀레쉬의 <야외 전화 박스>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욕망을 보여주었다. 신유물의 등장으로 기존의 것이 무색해지는 지점에서 귀레쉬가 자기 아버지의 고향인 쿠르드 지역과 알레비(터키 무슬림 소수민족 종교)를 찾으면서 시작했다고 한다. 이들은 고립되어있다. 전화선을 설치하고자 했지만 거부당했는데 그나마 남아있던 마을 대표의 전화선도 끊어지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이들을 소통의 욕구에서 구제해준건 신유물인 ‘핸드폰’이었다. 거대한 도시, 문명과 단절되고 정부의 소수민족 압박정책으로 고립된 이들은 오히려 신기술로 밖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영상작업을 통해서는 같은 기술이 서로 다른 공간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핸드폰이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 언덕을 오르는 것은 불필요하고 또 오지에서나 할법한 불편한 행동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 되었다. 고행길을 오르는 것은 그들이 소통의 욕구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영상 속에서 항상 그들이 성공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나에게 소통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장면들이었다. 이들이 소통하기 위한 노력을 할때 나는 너무나도 쉽게 그것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레쉬 작가는 국가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현재 사회의 모습과 변화하고 있는 세계의 모습의 차이에서 오는 모순점을 이야기 한다. 화면 속에는 일 년 동안 변화하는 계절에서 작가가 다양한 연령대, 집단, 인물들을 담아내고 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계절도 바뀌지만 여전히 그들은 커뮤니케이션의 현장인 언덕으로 계곡으로 가기위해 온힘을 다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에서 출발한 이 작업은 나아가 사회적인 문제에 봉착한다. 휴대폰을 통해 간신히 소통하는 이들은 어떻게 보면 부족함없이 소통하는 도시인들이 진정한 소통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야외 전화 부스 Open Phone Booth, 2011 3 channel synchronization video, 16-9, 33 min. 46 sec.
Courtesy the artist, Rampa (Istanbul) and Gallery Martin Janda (Vienna)
<혼천전도>는 18세기에 서양 천문학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동양의 천문도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있는 천문도이다. 서구의 지식이 우리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이것은 많은 문화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서구의 유입과 동양의 수용이 보이는 지점, 사상과 과학의 유입, 결합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공유되는지에 대해서 다시 돌아보게 했다. 이것은 서양의 것이 유입된 지금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시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하면서도 각기 다른 문화가 서로 융합된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게 다가오기도 하였다.
혼천전도 The Complete Map of the Celestial Sphere (Hon-cheon-jeon-do),
19th century (Unknown Artist) Traditional paper, replica,
86.7×59 cm Original collection- Seoul Museum of History
야오 루이중의 사진작업 중 <인간성의 이면>은 복제된 신화에 대한 사유였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화면으로 보이는 사진 속 공간은 생경한 느낌을 들게 했다. 복제된 신상들과 신화 속에서 나올 법한 오브제들이 촬영된 작업은 본래 그들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속성이 배제되어있다. 신성성과 같은 것들은 더 이상 그안에 현존하고 있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 작가가 포착하고자 하는 지점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작가는 작품에 대해서 설명하며 “이것은 무심하고 익숙지 않은 현실 세계의 풍경에 부딪힌 인간들의 말할 수 없는 슬픔을 포착하려 한다.”고 말한다. 작가가 말하는 말할 수 없는 슬픔을 해소하기 위해 사람들은 우상을 세우고 종교를 만드는 등 여러가지 활동을 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슬픔을 해소하고 안정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이를 위해 작동해야 하는 것들이 작품 속에서는 어색하고 무엇인가 결여된 것 처럼 보인다. 신화와 이야기는 현대로 거듭날수록 복제되고 있는데 수많은 복제를 통해 성이 제거되고 속이 만연하는 사물을 작가는 포착하고 있는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것은 우리가 항상 포착하고 보게되는 이미지들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항상 복제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있을지도 모른다. 눈으로 보는 것을 기록하고 남기고자 하는 것 또한 그런 욕망의 한 종류가 아닐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행동들은 우리가 담아내고자 하는 것들의 의미를 배제하고 껍데기만 제시하는 것 처럼 보일때도 있다. <인간성의 이면> 작품에 포착된 사물들, 신상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이 작업은 우리가 평소에 당연시 받아들이는 우상이나 신상들이 사실은 인간의 ‘야수성’과 ‘야만성’을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했다.
<인간성의 이면> 연작 중에서. 마츠, 대만 From the series Beyond Humanity.
Matsu, Taiwan, 2008 Photography, 100×150 cm
아시아의 근대화는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면서 이루어졌다. 냉전시대의 상처를 통해 혹은 서구의 강압적인 개방으로 인해 시작되기도 했다. 근대화의 시작부터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는 많은 것들이 폐기되고 결여되어졌다. 현대로 직행하면서 과거의 역사를 도태시키기도 했으며, 근대화의 과정속에서 인간성을 포기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공동체의 건강한 결과를 위했지만 빠른 결과를 보기위한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고 보인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것들은 감추어졌기 때문에 쉽사리 들춰볼 수 없다.
‘프로펠러 그룹’의 <쿠치의 게릴라>는 베트남 호치민 시 외곽의 쿠치에 있는 ‘쿠치 터널’이라고 불리는 지하 터널을 보여주고 있다. 이 터널은 미국-베트남 전쟁때 미군에게 맞서기 위해 베트콩들이 건설한 것이다. 미국-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기술력으로 해결하지 못한 전쟁이기도 했는데 이를 달성할 수 있게 했던 것이 이런 터널들이었다. 이 터널에서 역설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작가는 포착한다. 전쟁의 흔적으로 상징화되어야 할 공간인 터널은 미국인들의 전쟁 체험 관광에 이용되고 있다. 놀이공원과 같이 조성되어 미화 1달러에 총알 1개를 격발할 수 있게 되었다. 총알을 발사하는 미국인들의 즐거운 반응을 슬로우 모션으로 잘 볼 수 있었다. 총을 준비해주는 베트남인도, 총을 쏘는 미국인도 어느하나 지나간 역사 속 전쟁에 대해 자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서로의 이득을 위해 행동하고 있었다. 나는 미국인들이 쏘는 총을 쏘고 베트남인이 그것을 돕는 장면히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전쟁 당시에는 총알을 지금은 달러를 베트남에 쏴버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영상작업의 소리는 <쿠치의 게릴라>라는 베트남 선전영화와 결합되어 있다. 미국인들이 총을 쏘는 공간에서 미국을 물리친 베트남의 위상을 담은 영화가 상영되는 것 만큼 모순적인 일이 있을까? 결국 자본에 모든 세계가 지배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이는 근대성의 과정에서 결국 지나간 사건의 중요성, 의미가 퇴색되고 관광을 통한 수입의 증대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만을 고집하는 행태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근대성을 이룩하면서 포기해야했던 자본으로 환산할 수 없는 다른 중요한 것들을 상기시키며 반성의 태도를 취하는 것 같다.
쿠치의 게릴라들 The Guerrillas of Cu Chi, 2012 Video, color, stereo, 20 min. 4 sec.
Courtesy the Propeller Group
마할디카 유다의 <선라이즈 자이브>는 아주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이 작업은 근대성의 산물인 규칙과 규율이 얼마나 쉽게 실패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어디에나 만연하는 훈육과 규율에 사람들은 적극적인 저항을 표하기 보다는 설렁설렁하는 태도를 취할때가 많다. 이를 통해서 그들은 규율을 회피하고자 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노동자들도 다르지 않다. 그들의 아침체조는 매일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노동자들은 엉뚱한 행동을 하거나 반대의 방향에서 체조를 하는 등 여러가지 저항을 하고 있다. 규칙, 규율로 완벽할것만 같았던 것들이 이렇게 쉽게 배반당하는 것이다. 체계와 규칙이 필요한 그 순간은 ‘혼란’으로 가득해져버린다. 하지만 혼란할 것 같은 영상 속 화면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인다. 이 순간이 바로 근대를 지나오면서 우리가 발전하기 위해 세운 규율이 얼마나 쉽게 혼란스러워질 수 있는지 간접적으로 제시하면서 동시에 그 혼란속에서도 여전히 긍정적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고 생각된다.
선라이즈 자이브 Sunrise Jive, 2005 Video, color, sound, 7 min. Courtesy Forum Lenteng
나나 피셔 & 마로안 엘 사니의 작업은 <디스토피아를 부르는 주문>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이 작업 속 배경은 일본 연안의 하시마 섬이다. 이 섬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인공섬이다. 마치 군함과 같이 보이는 섬은 탄광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탄광의 수명이 다하자 섬 안의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다. 전성기 때에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었다고 하는 이곳은 이제 누구의 발자취도 찾아 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에 이곳은 유령이 떠도는 상상속에서 신화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 중국인 등 타지의 사람들을 데려와 탄광의 인부로 착취했던 사실도 신화적 이야기를 통해 제거된다. 많은 일본의 만화와 영화가 이곳에서 신화적인 의미를 찾고자 하며 그것을 보여주었다. 작품 속에는 과거의 주민의 삶과 만화, 영화등의 매체를 통해 이것을 간접적으로 접한 고등학생들의 이야기가 보여진다. 나는 이 작품이 버려진 인간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에서 보여지는 근대성의 과오들이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다고 보였다. 영상 작업을 통해 작가들은 지나간 역사가 어떻게 잊혀지고 상상력에 의해 재해석 되는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이런 작업들은 인간이 소외된 근대성에 대한 반성으로 보인다. 미카일 카리키스의 <소리내는 아이들>또한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 곳은 아시아가 아닌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그 차이점이다. 영상작업은 너무나도 생경했다. 곧 폭발하거나 사그라들것만 같은 지열지대에서 아이들이 뛰어 놀고 말하고 있었다. 아이들만 있다는 것도 불안하게 느껴지는 이유였다. 이 작품의 배경은 이탈리아 투스카니이다. 악마의 계곡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최초로 지열 발전소가 설립 되었지만 단테의 신곡 중 지옥을 연상할 만큼 불안한 공간이다. 발전소는 최근까지 작동하여 사람이 많이 살았지만 자동화 기술의 도입으로 사람이 없는 곳으로 변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계획과 그것의 실패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장소라고 한다. 하시마 섬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지옥’이라는 신화적 공간을 대입해서 상상하는 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작가는 이곳을 놀이공원 처럼 탈바꿈 시킨다. 아이들은 거리낌없이 이곳에서 놀고 움직인다. 그 순간들은 아주 순수한 움직임처럼 느껴졌다. 또한 우리의 계획, 역사가 사실은 유용성과 실용성으로 모든 것을 판가름해서 발전해왔던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디스토피아를 부르는 주문 Spelling Dystopia, 2008 2 channel video installation,
HD video, stereo, 17 min. 16 sec. Courtesy the artists and Galerie Eigen+Art
소리 내는 아이들 Children of Unquiet, 2013–2014 HD video, stereo sound, 15 min. 30 sec. Courtesy the artist
환상에 대한 경고
최원준의 <만수대 마스터 클래스>와 필라 마타 듀폰트의 <이상적인 포옹>은 분단의 현실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꿈꾸는 환상적인 통일에 대해 경고하는 것 처럼 보였다. 또 노재운 작가의 작업은 CG와 같은 특수효과의 홍수속에서 수동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만 있는 우리들에 대한 경고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환상에 대한 경고라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이 인간을 긍정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점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오히려 이 경고라는 지점이 긍정적인것이라 생각한다.
만수대 마스터 클래스 Mansudae Master Class, 2014 3 channel HD video,
archive installation Archive installation- Commissioned by SeMA Biennale Mediacity Seoul 2014
먼저 필라 마타 듀폰트의 <이상적인 포옹>은 조국 통일 3대 헌장으로 나타나는 두 여성이 중심이다. 두 여성 인물은 서로를 껴안는다. 그들은 즐거운 표정을 짓지만 이내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 이들의 감정은 양가적인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들이 처음 껴안는 그 순간은 낭만적인 통일에 대한 환상이라면 그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현실의 자각이라고 생각했다. 민족적으로 하나가 되고 이루어져야 할 통일이라는 염원은 현실적인 많은 문제에 봉착하여 힘들어진다. 이념의 대립으로 갈라진 두 나라는 낭만적으로 합치고자 하는 꿈을 꾸고자 하지만 그것은 정말 환상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 되어버린다. 이 작품속 두 인물의 미묘한 감정 변화는 그것을 잘 포착하고 있다. 인물의 감정을 통해 한국 사회 전체가 감추고 있는 통일에대 한 무지함, 문제를 들춰내고 있다고 보인다.
<만수대 마스터 클래스>는 이념의 대립으로 소통이 단절된 북한의 미술을 해외의 거대한 조각들을 통해서 볼 수 있다는 것을 재조명한다. 나는 이것이 역설적이라고 생각한다. 타지에서만 볼 수 있는 북한의 조각들은 그 나라의 특수성을 나타내기 보다 북한이라는 곳 자체의 이념을 표출하는데에 더 적합해 보였다. 만수대 마스터 클래스 속의 북한 작품을 만드는 곳은 만수대 해외개발사이다. 이곳은 1959년 김일성의 교시에 의해 설립된 만수대 창작사의 해외개발부서라고 한다. 만수대 창작사는 북한의 이데올로기 이미지를 만들어 프로파간다로서 훌륭하게 작용할 수 있는 작품들을 많이 만든다. 또한 해외개발사는 1974년 에티오피아의 혁명승리탑 무상 건립을 시작하면서 마다가스카르, 토고, 기니 등등에 무료로 건물과 기념비를 세우고 있다. 이렇게 아프리카에 존재하는 북한의 제작물들은 그 나라의 역사와 사건에 관련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북한의 대형기념물을 실질적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장소이다. 이런 모순성이 분단현실을 더 자각하게 한다.
이상적인 포옹 The Embrace, 2013 HD video with sound, 5 min. 4 sec. Courtesy the artist
특수효과란 적나라한 환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알면서도 속는다. 이 현상에 대해 꼬집는 작품이 바로 노재운 작가의 <지팡이>이다. 작가의 <지팡이>란 오늘날의 영화, 게임에서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서 권위를 가지게 된 특수효과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작품의 의미는 그 특수효과에 대한 찬사도 비판도 아니다. 작가는 특수효과라는 것을 전혀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자는 입장을 취한다. 환상을 보여주고 마법이나 극단적인 미래기술을 보여주기위한 특수효과가 아닌 다른 의미의 특수효과를 작가는 보여주고자 한다. 작가는 ‘지팡이’가 특수효과라는 하나의 현상을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지팡이’는 마법을 부리는 매개체로서 특수효과를 화면속에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지팡이가 모든 사람의 소유여야 한다고 한다. 이 말은 수동적으로 특수효과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특수효과의 권위에 눌려 지팡이로 사용하는 마법이나 주술적인 것들을 받아들인다. 작가는 영화에서 나타나는 지팡이를 빼앗아 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여기서 우리는 환상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영상작업과 함께 설치로 볼 수 있는 작품은 ‘지팡이’가 환상을 부르는 것임을 상기시켜준다.
지팡이 Wands, 2014 Mixed media interface
dimensions variable Commissioned by SeMA Biennale Mediacity Seoul 2014
이번 미디어 시티 서울 2014는 한 가지로 압축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하지만 귀신, 간첩, 할머니라는 세 가지 키워드 안에서 전시의 이야기가 이루어졌다는 점 만큼은 분명했다. 그것은 아시아의 역사와 냉전시대의 상처 그리고 아시아의 샤머니즘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아시아적이라는 특수성을 넘어서 보편적 인간 사회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는 작업들을 보고자 했다. 따라서 ‘근대성’으로 대표되는 발전속에서의 문제점과 ‘환상향’을 꿈꾸는데에서 찾아오는 현실적 문제점을 다루는 작가들의 작업을 집중하고 이야기했다. 나는 전시를 보면서 다양한 영상, 미디어 작업들이 역사와 시간, 사건들에 대한 문제를 미술로 끌어오는지 알 수 있었다. ‘귀신’은 내 마음 속에서 역사와 함께 다시 살아났고, ‘간첩’은 더 이상 환상이 아닌 현실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에 대해서 아쉬운 마음과 슬픈 감정이 생각났다. 전시는 항상 답을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로, 이야기로 이어진다. 나는 이번 전시를 통해 내 안에 흩어져있었던 역사의식, 아시아에 대한 생각들을 ‘미술’을 통해 다시 모아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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