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끝나지 않을 

<수정사항>

교역소 

2015. 6. 13(토) ~ 14(일)








6월 13일 토요일 4시경 서울시 중구 봉우재로 103번지 건물 옥상에서는 분주한 움직임이 일었다. 그들은 13일부터 14일까지 장장 13시간의 행사를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공간의 이름은 ‘교역소’였다. 다소 낯설게 느껴질 사람도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이 공간은 무료로 임대해 행사를 진행해 오고 있다. 지난 2014년 12월에는 <상태참조>라는 이번 행사의 시퀄격 행사가 진행되었다. 아쉽게도 필자는 지난번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기에 생생한 비교의 감정을 전달할 수 없음을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어찌 되었든 이번 행사의 제목은 <수정사항>이다. 사실 이 제목은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영어 제목으로 바꿔볼 때 그 의미가 한층 더 다가온다. 영어 제목은 바로 <Patch Note>이다. 그렇다. 우리가 흔히 ‘게임’을 할 때 많이 보는 그것이다. 


패치노트-수정사항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게임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증명하는 텍스트물이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 보자면 게임 기획자들과 게임플레이어가 소통하고 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이번 ‘교역소’의 행사 역시 <상태참조>의 행사가 단발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교역소는 이번 행사를 소개하는 방식에서 ‘게임’개념과 단어를 사용한다. 이를테면 행사를 기획하고 도움을 줄 사람들을 NPC(None Playble Character)로 상정하거나, 작가를 플레이-참여자로 관람자를 비플레이-참여자로 명명해 역할을 정해준다. 하지만 이것은 기존의 작가-관람객의 수직구조가 아닌 자유로운 수평적 구조이다. 왜냐면 둘 모두 결국 ‘참여자’이기 때문이다.


총 18팀의 플레이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하고 보여준다. 이 공간은 협소한 잔디밭 위에 덩그라니 의자 몇개가 놓여있는 모양인데, 작가와 관람자가 누가 누구인지 모르게 섞여 있어서 다소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수평적’ 구조로 생각해보자면 일견 전통적 강연-행사와 다른 어리숙함, 격식 없음, 규칙의 비존재가 매력적이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필자는 이 글을 이 행사의 면모를 비판하거나 지적하고자 작성한 것은 아니다. 이 글의 목적은 단지 <수정사항>이라는 행사에서 느낀 것들에 대한 리뷰가 될 것이다. 이 리뷰는 내가 본 모든 작업을 서술하지 않을 것이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 몇몇 작업에 대한 소고가 될 것이다.


가장 처음 내가 맞이한 순서는 ‘호상근’ 작가가 진행하는 <조금 이른 청승의 시간 : 관용과 이해, 역지사지>였다. 이 시간은 일종의 대화라고 볼 수 있고, ‘호상근’ 개인의 작업의 연장선으로 보이기도 했다. 장장 2시간 이상을 그는 행사를 이끌어가려고 노력했는데, 그의 긴장감이 불편하지 않았던 것은 왜일까? 나는 그 자리가 바로 작가 자신이 스스로를 비판하는 자리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호상근’ 작가는 ‘호상근재현소’ 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다른 이의 사연을 듣고 그 중 한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우편으로 보낸다. 그런데 이번에는 작가가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고 듣는 이들이 그것을 그려야했다. 여기서 반전효과와 자아비판이 이루어진다. 작가는 자기 작업의 ‘디세뇨’를 듣는이들의 손을 통해서 실현시킨다. 비록 스스로 작업의 완성을 짓는게 아니더라도 남의 손에서 결론되어진 자기의 구상물을 본다는 것은 ‘자기위로’와 ‘자기비판’이 동시에 작동하는 것이다. 그는 떨면서도 무엇인가 흥분에 차있는 것처럼 보였다. 




호상근 <조금 이른 청승의 시간 : 관용과 이해, 역지사지>



몇 개의 순서가 지난 후 ‘이현우’ 작가의 <video sound gig B>가 시작했다. 이 작업은 ‘촬영되는 영상’과 ‘소리’에 중점을 둔 작업이다. 퍼포머는 핸드폰 마이크에 어떤 소리를 낸다. 그러면 그 소리는 에코와 효과음이 섞여 변용되어 영상에 개입된다. 점점 실제 세상의 소리가 영상에 재생되는 속도가 늦어진다. 소리와 영상의 싱크가 빗나가고, 뒤틀릴 때 괴리감이 생기고 비디오의 허구성이 극대화된다. 다소 실험적인 작업이었지만 매우 흥미로웠다. 


다음 행사들을 보지 못하고 나는 ‘조대원’작가의 <Bar>에 향했다. 이 작업은 행사가 진행되는 내내 열려있는 공간으로 제시되었다. 누군가가 <Bar>에 다가가면 작가와 대화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작가는 참여자의 시간을 요구한다. 이 <Bar>의 형태는 키치적이고 조악하기 이를데없다. 진짜 ‘바’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형태이기도 하고, 장막이 쳐져 있어 바텐더-작가를 볼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곧 이 작업의 궁극적인 장점으로 나타난다. 장막에 가린 바텐더와 손님은 서로에게 더 솔직해지게 된다. 이곳은 자본주의 ‘돈’ 거래에 의해 상하수직적 관계로 나타나는 곳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곳이다. 익명성에 의해서 실현되는 수평적 대화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모를 수록 더 극대화 된다. 작가가 대화의 시간을 요구한 전략은 자본주의의 원칙을 뒤집는 동시에 원시적 거래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 작업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시간이 아깝지 않은 것은 작가와 내가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조대원 <Bar>



<Bar>에서 나온 후에는 ‘실패’하는 사건을 통해 작업이 완성되는 과정을 보았다. <The last romance of fires>라는 작업은 ‘남동현’작가의 작업이었다. 작업은 ‘불’에 대한 서사적 이야기를 텍스트와 이미지로 보여주는 방식을 취한다. 프로젝터로 투사된 가상의 텍스트와 이미지 그리고 실제로 관람자 앞에 놓인 물질로서의 이미지가 있다. 여기서 텍스트와 이미지는 서로 상호보완하는 관계를 맺는다. 그들은 무엇이 무엇에 선행하는 구조로 짜여있지 않다. 불의 꿈, 욕망과 같은 이야기들이 진행되면서 실제 사물(그것들도 불에 타기 쉬운 종이에 재현된 것에 불과하지만)은 움직이기도 하고 불에 태워지기도 한다. 이야기는 이미지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동시에 이미지는 텍스트의 도움을 받아 인지가능한 영역으로 도출된다. 마지막에 우주로 출발하는 우주선의 모습을 보이며 불로 붙인 연을 날리는 것으로 작품은 마무리 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연은 나는데 실패했다. 관람자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그것이 날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했다.(불이 날까 걱정하는 마음이 반이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결국 연은 날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함으로서 <수정사항>의 과제는 달성되었다. 만약 <수정사항>에 ‘버그’가 포함되지 못한다면 다음 <수정사항>이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인이다. 이 작업의 실패라는 의외성은 참여한 행사와 더불어 색다른 효과를 자아냈던 것이다. 





남동현 <The last romance of fires>


다른 순서가 지나다 보니 어느새 13일이 지나고 14일의 새벽이 찾아왔다. 새벽에는 영상상영이 꾸준히 이어졌다. ‘이재임’ 작가의 <강릉여인숙>이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이유는 요즘에 내가 느끼던 갈증과 상충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의 영화에서 ‘아버지’의 문화적 상을 강하게 형성시킨다고 생각했다. ‘국제시장’, ‘장수상회’와 같은 영화는 희생된 아버지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우리에게 ‘아버지’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이재임’작가의 <강릉여인숙>은 단적으로 여성 중심적으로 뿌리를 되찾아보는 작업이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이 작업은 ‘외할머니’의 여인숙이 있는 강릉 태백에서 진행된다. 이곳은 탄광촌이 있었던 곳이다. ‘탄광’이 어떤 공간인가? 그곳은 굉장히 ‘남성’적인 곳이다. 작가는 이 탄광의 이미지를 ‘차용’의 방식으로 끌고 오지 실제로 촬영해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에 반해 ‘여성’적 공간인 ‘여인숙’은 실제로 촬영한다. 근대 시대를 지나며 희생된 사람이 ‘아버지’만이 아닌 ‘어머니’도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미지가 다시금 폭력적인 남성상을 은밀하게 주입하는 전략에 반대되게 ‘어머니’의 이미지를 직접 보여준다. 여인숙과 함께 살아온 그들은 역사 그 자체의 도큐멘트로 생생하다. 스스로가 쓸모없다고 말하는 할머니들은 사실 근대의 살아있는 역사이다. 작가가 남성적 공간과 여성적 공간을 분할하고 그곳을 보여주는 전략이 명석하다고 생각된다. 이 작업의 의의는 작가 본인의 가족사에서 출발해 한국 근대를 진단하고 ‘동시대’의 문제점까지 짚어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문제는 명백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몇몇 단서로만 추측 가능할 뿐이다. 그렇기에 답답하고 더 서글프게 느껴진다.


<강릉여인숙> 이후에 7개 정도의 순서가 지나고 원래 일정보다 조금 이른 3시 30분경 <수정사항> 행사가 끝이 났다. 나에게 이 행사에 참여한 시간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인스턴트 공간’과 ‘청년세대’ 작가들이 꿈꾸는 염원들은 각각 작업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거나 혹은 감춰져서 밝혀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약간의 노파심에 걱정을 덧붙이자면 <수정사항>이라는 맥락 자체가 가지는 위험성이 ‘청년세대’의 예술에 적용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패치 노트는 패치를 거듭할수록 게임을 망칠 뿐이다. 그것을 해결할 방법은 새로운 게임의 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이들의 게임이 오픈베타를 지나 정식서비스의 문턱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 걱정은 쓸모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신생공간들은 어떻게 스스로를 정의하고, 기획하며, 살아남을지 고민할 것이다. 그들은 ‘헤쳐! 모여!’ 의 전략으로 움직인다. 이들의 예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예술을 즐기는 자를 위한 예술’이다. 능동적 관람자와 작가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즐겁게 노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서 있다. 나는 이들의 업데이트가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결코 끝나지 않을 그들의 <수정사항>이 되기를 바랄뿐이다.


P.S

이 글은 본문에도 나와있듯 비평문은 아니다. 신생공간에 대한 논의는 필자 역시 작성하고 싶은 주제이다. 그래서 이번 행사를 계기로 조금의 연구를 시도하고자 한다. 내 연구는 신생공간을 모두를 정의하고 분석하는 아카이빙작업이 되지는 않을것이다. 단지 그것에 대한 ‘비평’으로 작동하고 싶다. 이번 행사에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이제 이들이 ism에서 자유로운 세대라는 것이다. 


P.S 2

이미지는 조만간 '교역소'에서 올라오는 것으로 교체할 예정이니 양해 바란다.


사진출처 - 교역소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gyoyok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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