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토 미술관

엘름그린&드라그셋

천 개의 플라토 공항

2015. 7.23 - 10. 18



불만의 욕망을 채우지 않는 무기력한 이미지


우리는 익숙한 것들에 숨은 모순을 쉽게 지나친다. 공간, 제도, 관습 안에 내재한 이 모순들은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있음에도 다른 어떤 이유로 덮어진다. 그렇게 사회적으로 무시되는 모순점들은 예술의 주요 공격대상이다. 몇몇 예술은 모순과 부조리를 미적으로 낚아 올린 후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계몽을 시도한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런 행위에 다소 효과가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무의미한 행동이 돼버렸다. 결과적으로 계몽은 무한히 반복되는 실수들로 치환되고 지속하는 오류들에 사람들은 점점 무기력해진다. 그래서 이제는 ‘부조리’에 ‘무기력’이 수반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미지를 보아야 할까? 듀오 작가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을 통해 그 방법을 엿볼 수 있다.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은 미술관을 다른 공간으로 도치시키거나 사막에 명품매장을 그대로 재현하는 등, 본래의 장소에서 축을 이동시키고 감춰진 모순을 들춰낸다. 이번 플라토 미술관의 기획전인 <천 개의 플라토 공항>에서 기존 작업의 내러티브는 유지되면서 부조리 그 자체와 부조리를 보여주는 일이 얼마나 ‘허구’적인 일인지 전시에서 느낄 수 있다. 오늘은 그 무기력한 이미지들이 어떻게 ‘가상’으로 회귀하는지 되돌아보려 한다.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은 각각 덴마크와 노르웨이 출신의 작가다. 그들은 본래 미술가가 아니라 시인과 연극연출가였다. 1995년 첫 듀오를 결성하고 작업을 시작한 이래로 그들은 스펙타클한 공간성과 현실을 레디메이드와 오브제를 통해 제시하는 다다적 작업을 보여줬다. 이전에도 그들은 ‘미술관’을 병원과 주택 같은 곳으로 리모델링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도 미술관에 재현된 것은 ‘공항터미널’이다. 두 작가는 공항의 표피적 형태를 그대로 재현한다. 사실 ‘천 개의 플라토 공항’이라는 제목은 들뢰즈&가타리가 쓴 ‘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에서 기원한다. 작가는 이 책의 기본 토대를 이루는 ‘리좀’이 미술관과 공항에도 적용된다고 말한다. 과정으로서 시작과 끝이 아닌 리좀은 어디론가 가기 위한 통로로 기능하는 장소 또한 규정한다.



천 개의 플라토 공항으로 가는 길에 있는 안내판



플라토 미술관 밖 유리 구조물



티켓 확인하는 곳



<지옥의 문>의 표지판으로의 변질



<출발>





공항 카트


전시장에 가는 길의 안내판, 전시장 밖 삼성생명 건물과 연결된 유리 구조물에 이어진 공항 대기화면은 단순히 내부구조를 바꾸는 게 아니라 주변의 분위기, 밖의 외형적 부분까지도 공항의 맥락에 이어 맞춘다. 전시장에 들어가면 전체적인 디자인이 공항의 풍경으로 바뀌어있다. 곳곳에 항공사 카트가 있다. <지옥의 문>은 면세점과 공항 입구를 가리키는 표지판으로 변했다. 이 공간에 있는 작업 이름 처럼 <출발>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출발> 작업은 어떤 공항에서도 볼 수 있는 흔한 출/도착 시간안내판이다. 천천히 글자를 훑다 보면 도착지에 황금의 땅 엘도라도, 심리학자 라캉의 이름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허구의 명칭들이 왜 써져있는가? 이 허구의 도착지는 바로 공항을 그대로 재현해낸 듯한 리얼리티를 배반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 장소가 가상임을 경고하면서 출발하도록 한다. 그들은 길게 체류하지 않지만 스펙타클을 형성하는 ‘공항’이 가지는 리좀적인 ‘비장소성’을 숨기려고 한다. 미술관에 ‘비장소적’ 공간인 공항이 재현되면 그것은 곧 ‘가상’에 다름없다.



보안 검색대 - 전시장 입구공간에서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



<밸류>


기대감에 아직 부푼 체 공항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보안검색대를 통과한다. 이 검색대는 일반검색대와 의료관광용이 나뉘어있다. 실제로 작가들이 ‘인천공항’에서 본 것으로 그들이 현실의 형태를 얼마나 치밀하게 재현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앞에서 리얼리티를 조롱하듯 허구성을 드러낸 것을 보았다. 상충하는 리얼리티와 가상성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검색대를 통과하고 나면 우리는 <모던 모세>라는 작업을 먼저 보게 된다. 그 전에 유리 벽 밖에 있는 ‘아이스박스’는 쉽게 놓쳐진다. 이 ‘아이스박스’는 <밸류>라는 작업으로 이전 전시에 제시되어온 시리즈이다. 아이스박스는 그 자체로 어떤 의미도 내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시된 환경에 맞춰 의미는 가변 된다. 아이스박스는 ‘테러’를 상기시킨다. 만약 지금까지 테러가 없었다면 공항 내에서 ‘아이스박스’는 다른 의미 혹은 그냥 아이스박스였을 것이다. 공항이 가지는 비장소성 때문에 물체 자신보다 반복된 사건이 그것을 정의하게 된다. 공항의 비장소성은 과정이고 원인도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곧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는 뜻이다. 누구의 소유가 아니므로 우리는 더 무심해진다. 



<This space can't be yours.(이 공간은 당신 것이 아니다.)>



<This space can't be yours.(이 공간은 당신 것이 아니다.)>



<This space can't be yours.(이 공간은 당신 것이 아니다.)>


무책임에서 특정되는 비장소성은 <This space can’t be yours>에서도 나타난다. 공항의 광고판인 이 작업은 회전하며 돌아가는데 ‘이 공간은 당신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은 아래 중간 위를 번갈아가면서 나타난다. 원래 공항에서라면 [This space can be yours-이 공간은 당신 것이다.]라고 쓰여있어야 한다. 광고판을 구매하도록 호도하는 문장은 ‘전시장’에서 ‘비장소성’을 측정하기 위한 텍스트가 돼버린다. 우리에게 공간이 소유되지 않았음을 자각시켜 ‘비장소적’인 공항의 모습을 각인시킨다. 뒤이어 우리가 보게될 이면에 숨겨진 부조리와 그 부조리에 대한 무기력감에 앞서 작가는 이 공간 전체가 ‘가상’임을 먼저 보여준다. 우리는 전시장의 리좀스러운 가상성을 스포일러 당한 체 관람하게 된다.



대기장소 공간 전경



<gate 23>



<뒤집힌 바>


가상의 공간임을 인식한 채로 다음 공간에 들어서면 대기장소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gate 23>으로 가는 계단이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진 것을 알 수 있다. 뒤집혀 이용되지 않는 <뒤집힌 바>와 의미가 부정확한 <반입금지 물품목록>, ‘소수자’로서 작가 본인들을 상징하는 <he(black)>은 이 공간 내에서 다층적으로 무력감을 형성한다. 특히나 <gate 23>은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의 상징에 다름없다. 작가들은 이 작업이 사회적 유동성을 진단한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개천에서 용날 수 있는지’ 의문을 품은 것이다. 그러나 개천에서 용이 나올 기회는 사라진 지 오래다. 그 믿음은 종교적인 믿음과 비슷한 환영이었다. 우울한 무기력함은 <무기력한 구조물> 시리즈로 이어진다. 좁은 복도에서 보이는 흰 문들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힘을 잃어버렸다. 조금만 변형하면 힘을 잃고 무너지는 젠가 같은 이 구조물들은 제도가 가지는 부정적 허점들과 동시에 <gate 23>과는 다르게 긍정적인 방향의 변화도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낙관적 전망을 보여준다. 전시 초입에서 <출발>이나 공간의 소품들(카트, 보안검색대 등)을 통해서 점점 드러난 사실은 이 대기실 공간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공항의 리얼리티에 대한 작가들의 함정이다. 그 함정은 바로 ‘콩코드 여객기 의자’다. 과거의 것인 콩코드 여객기 의자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들은 공항 전체를 사실 ‘1960년대에서 상상한 2015년’의 모습으로 디자인했다. 따라서 이 공항 전체의 리얼리티는 그 전제부터가 ‘상상’이었던 것이다.





<무기력한 구조물>


<2010년 1월 1일로서> 작업은 우리가 들어올 때 통과한 보안검색대를 다시 상기시킨다. 이 작업은 공항에서 엑스레이로 촬영된 개인의 ‘짐’의 속을 모두가 볼 수 있게 벽면에 거대하게 인쇄된 것이다. 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의 ‘짐’은 감시당한다. ‘테러’의 위협이 없는지 조사당한다. 이 합법적 통제는 그야말로 공항의 모순이다. 자유롭게 떠나기 위한 곳에서 안전을 위해 이루어지는 통제는 우리 모두 인정한다. 좀 더 스펙트럼을 넓히면 자본주의, 민주주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자유’를 위한 ‘통제’가 그 자체로 사회구조의 모순적 부분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모든 이의 자유는 상대적이 된다. 그러나 아무도 거북함을 느끼지 않는 것은 여전히 그 행위가 우리의 자유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나 모순덩어리다. 게다가 무기력하다.



<2010년 1월 1일로서>


<주인과 하인>이라는 작업은 자본주의적 계급차별을 대리석과 나무라는 재질로서 구체화한다. 값싼 나무는 대리석의 밑에 놓여있다. 오히려 기능 면에서 효율 면에서 우수한 ‘나무상자’는 자본주의 안에서 높은 가치를 가지지 못했기에 하인이다. 부자는 그 이외에 모두를 잠정적 하인으로 두고 있는 사회에 산다. 그것은 절대 가시적이지 않다. <주인과 하인>과 같은 공간에 있는 <수하물수취대>는 역시나 공항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형태이다. 그런데 아무도 찾아가지 않을 가방이 뫼비우스의 띠를 돌듯 빙빙 돌고 있다. <2010년 1월 1일로서>에서 속내를 다 드러낸 가방일까? 우리는 그 가방에 붙어있는 태그(Tag)에서 또 하나의 ‘힌트’를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실제 독일에서 오픈 예정인 ‘브란덴부르크’ 공항에서 가상의 공간인 ‘플라토 공항’으로 보낸 것으로 적힌 태그가 붙어있다. 아직 오픈하지 않은 공간은 실제로 구성되어가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상’적이다. 동시에 도착지인 ‘플라토 공항’은 우리가 계속해서 봤듯 지극히 ‘가상적’이다. ‘가상’에서 ‘가상’으로 보내진 이 수하물은 도착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어디로 떠날 것이다. 그것은 전시장의 가상성의 ‘스포일러’와 ‘힌트’에 종결을 가한다.




<주인과 하인>


플라토 공항은 누구도 오래 체류하지 않으려 한다. 그곳은 거대장소로서 큰 건축적 스펙타클을 보여주지만, 우리의 관념에서 쉽게 잊히는 비-장소적 공간이다. 이 공항을 필두로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은 감춰진 제도의 무력감, 이중성, 허구성을 들춰낸다. 전시장의 건축적 알레고리, 소품들과 작업은 총체적으로 어우러져 ‘공항’의 내부형태를 지닌 거대한 오브제로 제시된다. 괄목할만한 점은 전시장에 있는 작업들이 예전 작업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설정들에 기존 작업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작업’이 가지는 일관성과 유연성에 기초한다. 또한, 전시공간처럼 개별작업들도 일종의 리좀으로서 어떤 완연한 결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거의 가깝게 재현하는 데 성공한 것은 ‘공항’의 ‘외적 형태’가 아니라 ‘공항’이 감추고 있던 ‘비밀’이다. 뒤이어 그 비밀은 사회적 모순에까지 확장된다. 모순이 강하게 시각화된 것은 ‘가상’임을 끊임없이 경고하기 때문이다. 전시의 끝에서 결과적으로 관람객은 어디로도 떠나지 못한 채 되돌아 입구로 나가야 한다. 마주한 모순에 저항할 수 없는 무력감만을 느끼게 된 것일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게 될까? 답은 내려지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이 공간을 나가면 우리는 다시 침묵한다. 전시장의 비장소성만큼이나 작업의 의미는 휘발적인 무의미함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이 무의미함은 곧 불만의 욕망을 채워주지 않는 이미지다. 알랭 바디우가 ‘현재에 대한 시적인 벌거벗음’이라고 말한 무기력하고 패배하는 이미지는 오히려 우리에게 다시 새로운 힘을 전달한다. 정답이 내려지지 않은 이 전시는 관람자의 경험에 따라서 다양한 답을 내릴 것이다. 그래서 작가들도 “개개인의 이야기와 감각을 곤두세우고 즐기는 것이 우리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by.하마


* 작품 캡션은 추후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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