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각-Move&Scale] Review

2015. 10. 19. 20:16

시청각

Move&Scale

2015. 10.9-11.14


생-生,사-死의 동시적 시각예술모델


미술은 전통적으로 어떤 장소에 귀속되어왔다. 고대에는 종교적 목적을 뚜렷하게 하기 위한 신전 벽화나 조각상으로 예술이 기능했다. 다음은 귀족들이 서민들과 문화적 차이를 만들기 위해 개인적으로 소장하기 시작했다. 근대국가에서는 시민을 위해 공개한다는 목적으로 미술관에 작품을 공개했다. 이후 정치, 사회와 연계되어 그 순간에 발화하는 예술작품이 등장했다. 해프닝, 퍼포먼스, 참여예술이 그러한 경향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작업들도 사진과 영상기술의 발달로 소장할 수 있게 되었다.




장소에 귀속되지 않고 도록으로, 인터넷으로 기록되어 제시되면서 작업의 이미지가 필요한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취하게 되었다. 일명 ‘아우라’가 파괴된 후의 예술은 누구나 ‘소장’ 할 수 있다. 일회성 설치나 퍼포먼스는 작업이 끝나면 해체된다. 기록으로 남아 과거의 사건이 된 시각예술은 현재를 규정하는 틀로 기능한다. 동시에 현재 일어나는 기획은 미래의 작업을 예고할 수 있게 된다. 작업은 미래를 위해 해체된다. 생사의 순환고리처럼 작업은 생성과 죽음을 동시에 함유한다. 이런 삶의 형태와 닮아가는 영원불멸하지 않은 작업의 모습을 'Move&Scale' 전시는 보여주려한다. 이 전시는 서문에서 밝히듯 작업의 '생애주기'를 추적한다. 




'김지은' <만능 컨테이너 시리즈>

가변크기 각각 30x71cm(6pcs), 30x91cm(6pcs), 30x122cm(7pcs), 알루미늄판에 시트지, 2015


'Move&Scale'전시의 작업 전반은 해체 가능성으로 정의할 수 있다. 매체는 영상과 설치가 전부다. 반영구적일 수는 있지만 영원불멸하지 않은 작업들이 전시된다. 특히 '김지은'작가의 <만능 컨테이너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컨테이너라는 것은 물건을 배에 효과적으로 적재하기 위한 모델이다. 작가는 평면 알루미늄 판에 컨테이너 형태로 디자인된 시트지를 붙였다. 작업은 설치할 수 있는 벽면을 점유한다. 컨테이너 평면은 일정 규칙없이 부착된 것으로 보이는데 마치 실패한 테트리스 모양이다. 가변적인 형태는 해체되기 쉬운 것이다. '디자인 메소즈'의 램프 디자인은 '생분해'되는 플라스틱으로 제작되었다. 플라스틱은 원래 분해되지 않는 물질이지만 생분해가 가능한 플라스틱의 개발로 해체 가능성을 얻었다. 오늘날의 시각 예술 작품은 이 램프의 소재와 같이 분해되어 사라질 수 있다.



'디자인 메소즈' <3D Printed Lighting(Cone Type A-1 Pendent)

각각 143.2mmx135mm, 25 유닛, 990x990x1230mm, 생분해성 플라스틱, 2014(디자인), 2015(설치)




'이수성' <door piece>, 설치, 가변크기, 2015

시청각 어딘가에 숨겨져 있던 유리문들



'이수성' <door piece>, 설치, 가변크기, 2015





시청각의 열쇠(사본)



시청각의 평면도



시청각 계약의 종료시 원상복구 해야 할 것들의 목록



시청각 부동산 임대차 계약서(사본) 및 (재사본)



'이수성'작가는 <door piece>라는 작업으로 해체 가능성을 장소특정적으로 확장한다. 그는 '시청각'이라는 신생공간이 '임대'기간의 죽음을 담보한다는 것을 작업의 모토로 보여준다. 숨겨져있던 문을 시각적 결과물로 제시하고, 시청각의 임대 계약서, 열쇠, 손으로 그린 평면도, 임대가 끝났을 때 되돌려야할 목록을 전시했다. 이것은 장소가 죽어서 다시 돌아가야할 미래의 순간을 기리면서도 '시청각'이 기존의 미술관과 다르게 '해체 가능'한 장소임을 시사한다. 또한 이 작업은 지금 이 장소에서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증시켜준다. 장소의 해체된 미래를 보여주는 것은 디스토피아적 전략이지만 지금은 원활히 작동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작업의 해체가능성은 그것의 조직이 가변적 선택에 기인함을 보여준다. 이런 작업은 동시에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작업을 분해하고 재조립할 수 있다.



'정금형', <투어 자료> 설치전경










해체 가능성은 '생애주기'를 보여주도록 하는 형태적 틀이다. '정금형'작가와 '김민애'작가는 과거 자신의 작업을 이 전시에서 재구성한다. '정금형'작가는 자신이 해온 <휘트니스 가이드>, <심폐소생술 연습>, <7가지 방법>, <당신은 굴삭기와 섹스할 수 있습니까?> 작업들에 관한 영상을 상영한다. 영상 작업 주변에는 관련된 자료들을 나열해놓은 <투어 자료>작업이 전시되어있다. 작가는 수행된 순간이 아니라 거기에 연관된 부수적인 사건들을 공개한다. 그것은 준비과정까지의 모호한 고리를 채워줌과 동시에 아카이빙으로서 작가 자신의 지금까지의 작업 결과에 대한 재고로 보인다. 



'김민애' <남은건 도록>, 2008년 개인전 도록, 액자, 43.5x29.5cm, 2015



'김민애' <낚시대>, 각목-바람낚시(2008)의 일부, 

Move&Scale 부클릿 내부의 모눈종이, 3x3x360cm, 14x14cm, 2015



'김민애' <이제는 가장 쓰임새가 있을 만한 곳>,

알루미늄 반사판 - 모래성(2008)의 일부, 37x37x4cm, 2015


'김민애'작가는 2008년 전시했던 작업에서 떨어져나온 부분들을 제시한다. <남은건 도록>작업은 2008년 전시의 도록의 한 지면을 펼쳐 액자에 걸어서 제시했다. 전시의 순간적 결과물에서 해체된 작업을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라 떨어진 조각의 도상을 보여준다. '적극' 작가는 '다페르튜토 스튜디오'가 실행한 연극에 실제로 등장했던 '개'와 관련된 작업을 다시 보여준다. <2인극 a에서 ㅎ사이 '다페르튜토 스튜디오'>는 의자위에 '연극의 역사2'라는 책이 놓인 작업이다. 책을 펼치면 '다페르튜토 스튜디오' 연극에 등장했던 개를 찍은 사진들이 사이 사이에 꽂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책은 작업이 보여주려는 '개'와 '연극'이라는 접점밖에 가지지 못한다. 작가는 전시를 통해 끝나버린 연극의 죽음을 애도한다. 



'적극' <2인극, 최초의 표음문자 알파벳의 첫 글자 'a'>

140x139x180cm, 그레타 가르보와 흰 개, 2015




'적극' <2인극, 가장 새로운 표음문자 한글의 마지막 자음 'ㅎ'>,

98x139x180cm, 그레타 가르보와 검은 개, 2015



'적극' <2인극 a에서 ㅎ사이 '다페르튜토 스튜디오'>,

노란 개의 의자와 노란 개에 관한 책, 2015



'적극' <2인극 a에서 ㅎ까지 '다페르튜토 스튜디오'> 부분



작가들은 과거 자신의 작업 이후를 전시에서 제시한다.  과거의 작업이 재구성됨에 따라 지나간 시각적 결과물은 과정으로서 미래를 위한 모델로 기능한다. 전시가 끝나면 이번 작업들의 운명도 끝이 날 것이다. 그 이후에  어떤 모델로서 기능할 수 있을까?



'호상근'


<웰컴매트>

60x90cm, 고무, 카페트, 2015


<웰컴문발>

183x102cm, 망사천, 플라스틱 막대기, 2014




'호상근' <꽤 긴 입구> 비디오 3분, 2015


과거를 재구성하는 방식과 다르게 '호상근'작가는 전시에서 자신의 프로젝트 '호상근 재현소'를 예고한다. <웰컴 매트>와 <웰컴 문발>은 다른 장소로 들어가는 마법의 문처럼 보이도록 한다. 막상 공간에 들어서면 좌변기와 아이폰이 어울리지 않게 놓여있다. 관람객은 <꽤 긴 입구>라는 영상을 아이폰을 통해 볼 수 있다. 이 작업은 전시 기간 중 10월 25일부터 11월 1일까지 열리는 '호상근재현소'로 찾아오도록 한다. 영상에는 누군가에게는 익숙할 수 있는 연관없는 서울 풍경이 나타난다. 관람자는 영상 작업 제목 처럼 '꽤 긴' 시간을 더 가야 '재현소'에 도달 할 수 있다. '호상근' 작가가 재현소 프로젝트를 통해 그리는 개인의 이야기 처럼 <꽤 긴 입구> 영상 속 풍경들은 큰 의미 없지만 소소한 우리의 이야기, 풍경으로 보인다. 전시 기간 중 '호상근 재현소'가 열리는 날에 방문한다면 영상에 나온대로 40분을 걸어 찾아 갈 수 있을 것이고, 필자 처럼 아직 열리지 않은 날에 갔다면 방문 계획을 세울 수 있다. 만약 재현소의 일정이 끝난 뒤라면 기록으로서 미래의 프로젝트를 인식 하게 한다. 어떤 순간에도 이 '입구'는 '호상근 재현소'를 예견한다.


가변적 모델로 설치된 이 전시의 작업들은 '과거' 작업의 흔적으로 기능하거나(정금형, 김민애, 적극), '미래'의 순간에 찾아올 작업의 예고편으로 기능한다.(호상근) 동시에 전시된 작업과 같은 운명을 가진 전시공간의 속성을 재고하도록 돕기도 한다.(이수성) 과거 작업의 맥락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단지 이미지가 자신의 죽음 이후에 어떻게 재생될 수 있는지,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의 예언으로서 어떻게 동작할 수 있는지 이 전시를 통해 볼 수 있다. Move&Scale 전시는 이미 지나간 순간과 찾아올 순간 그리고 현재의 순간을 엮어서 보여준다. 작가들은 아카이빙의 원활한 동작으로 과거의 것을 쉽게 기록해 보여줄 수 있으며 미래의 계획을 편하게 예고할 수 있게 되었다. 작업의 이미지를 규정하는게 중요하지 않으며, 작업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고, 죽으며, 잊혀지고, 재생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도록 한다. 따라서 전시의 작업들은 선형적으로 진행되지 않는 가변모델을 필두로 비롯된다. 전시는 시각 예술의 결과물 뒤에 가려진 이면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를 통해 시각적 결과물의 무덤과 요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하나의 작업은 태생부터 무덤과 요람의 동시적 모델이다. 어쩌면 시각예술에도 분해자가 존재할지도 모를 일이다. 작업의 결과적 순간 즉, 죽음의 순간에만 관계하는 관람객이 바로 시각예술 분해자인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나도 하나의 분해자로서 작업을 환원시켰고, 그 결과로 글을 써냈다고 할 수 있을테다.



by. 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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