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삼 - 국민 [Review]

2015. 12. 2. 14:40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박윤삼

2015. 10.27-11.15

희망이 빈 세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좋은 방향의 해결책이 보일 법도 한데 우리 시야에는 지옥불반도가 보일뿐이다. 비극과 희극이 교차하는 세계의 불화는 비단 우리나라에 종속된 이야기는 아닐테다. 나의 일, 주변의 일 그리고 국가의 일에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위화감이 도사리고있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정치, 종교, 주택 등등 사회문제는 복잡한 관계로 엮여서 한국사회를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가시적으로 보고, 비판적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미술은 이미지를 담보로 하기 때문에 다양한 영역을 가시화하고 기저에 있는 것을 폭로하기도 한다. 사회문제, 사건에 대한 미술가의 소재선택은 비판의식을 고취하는 기폭제로 가능할 여지가 충분하다. 나는 스페이스 윌링 앤 딜링에서 열린 ‘박윤삼’작가의 개인전 <국민> 에서 감춰진 세계의 무의식적인 공허함을 보았다. 글의 도입부에서 밝히자면 ‘박윤삼’작가는 시뮬라크르로 가득찬 세계의 무능(력)한 모습을 효과적으로 폭로한다. 그 시도에서 매체가 다양하게 접목되는 것이 흥미롭다.





국민 (A People), 9 channel video, 2015



전시장에 들어서면 9명의 전, 현직 대통령의 취임연설 장면을 상영하는 <국민> 작업이 보인다. 영상은 연설문의 발화에서 ‘국민’이라는 단어를 제외한 소리가 제거됐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우리는 정치인의 ‘공약’만을 믿고 판단해야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질적으로 이행되지 않으며, 자리에 오르기 위해 벌이는 ‘쇼’임을 암암리에 우리는 알 고 있다. 그들이 열거하지 않는 것은 공(空)약이다. 그 비어버린 약속은 휘발성이 강한듯 쉽게 사라진다. ‘박윤삼’ 작가는 정치의 시뮬라크르를 효과적으로 대두시킨다. 대통령의 얼굴들은 무엇을 대변하고 있을까? 나는 그것이 정치일반을 대표하는 표상이라고 생각한다. 영상은 시대별로 상이한 화면을 가지고 있지만, 9명의 대통령들은 한결같이 ‘국민’을 외친다. 동시에 정치의 시뮬라크르도 동일하게 보인다. 대통령의 얼굴은 정치를 대변하는 동시에 그것의 불통, 무능함을 ‘국민’이라는 소리와 함께 제시한다. 작가는 지켜지지 않았던, 않고있는 정치의 허구적 위상을 해체해서 관자에게 비판적 의식을 촉구하게 돕는다.




전화, 개조된 전화기, 2015



<국민> 작업을 지나치면 느닷없이 ‘전화기’가 나타난다. <전화>라는 이 작업은 전시장을 부유하는 관람객에게 전화음이 울리면 수화기를 들도록 유도한다. 전화로 박정희,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들의 담화문이 원래 그들의 목소리가 아닌 아무개의 목소리로 들린다. 처음에 그 담화문은  <국민>작업에 비어있는 내용으로 착각된다. 이어서 전화와 담화문 연설이라는 형식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담화문 연설은 일 대 다수의 소통이다. 전화는 일 대 일(작품을 보는 다수로 상정할 수 있지만 적어도 전시장에 찾아온 이들로 축소되고 더 나아가 전화를 받은 한 개인으로 축소된다.)의 소통형식이다. 담화문 연설은 위계성과 일방성을 가진다. 똑같은 원고를 전화로 듣게되면 어떨까? 그것은 단지 ARS 전화와 다를바 없는 일상적 메세지로 변환된다. 여기서 작가의 전략이 드러난다. ‘박윤삼’ 작가는 ‘거시적’세계의 ‘시뮬라크르’를 폭로하기 위해서 ‘미시적’세계로 코드를 변환한다. 가령 <국민> 작업에서는 ‘대통령’이 말하는 ‘국민’이라는 단어와 삭제된 연설문을 통해 ‘거시적’세계의 시뮬라시옹된 ‘공약’을 ‘미시적’세계의 개인에게 폭로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화> 작업에서는 담화를 전화로 변환하는 전략을 사용한다. <국민>과 <전화> 작업은 비어있는 소리와 축소된 발화라는 형식을 통해 상호보완적으로 관계한다. 두 작업만 놓고 보면 마치 ‘박윤삼’작가가 아나키적이거나 정치를 다루기 위해 예술을 이용하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사회’와 ‘삶’의 관계라는 더 큰 영역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지 ‘정치’는 그 가지에 불과하다. 그는 계속해서 ‘거시적’인 것을 ‘미시적’으로 축소해서 보여주기위한 축적작업을 보여준다. 




왼쪽부터

조계사 (Jogyesa), 40장의 사진, 2015

여의도순복음교회 (Yoido Full Gospel Church), 40장의 사진, 2015

명동대성당 (Myeongdong Cathedral), 40장의 사진, 2015



<조계사>, <여의도 순복음 교회>, <명동대성당> 작업은 불교, 기독교, 천주교의 종교건물을 촬영한 작업이다. <국민>의 대통령 얼굴이나 <전화>의 느닷없는 전화기 처럼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는 이미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세 작업 모두 각각 40장의 사진이 벽면에 걸려있다. 크기가 작은 각각의 사진에는 종교건물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 풍경이 촬영되어있다. 나는 세 작업 모두에서 ‘화장실’ 이나 ‘자판기’, ‘벽면’, ‘꽃’ 같은 유사한 속세적 풍경을 보았다. 일상적이고 비종교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종교건물은 서로 무엇이 다른지 구별되지 않는다. 이렇게 비종교적 지시대상을 표적으로 하여 찍은 풍경이 폭로하는 것은 ‘종교적 믿음’이 아닐까? 작가가 촬영한 풍경과 사물은 그 종교건물에서 생활하는 신자에게는 종교적 의미로 가득할 것이다. 하지만 조각조각 해부된 종교의 비종교적 장기는 신성함을 잃어버린다. 종교적 공간안에 있는 ‘속세적’요소를 비난하는것이 아니라 그런 ‘속세적’요소를 통해서 종교가 얼마나 ‘믿음’을 실천하는데 부진한지 꼬집는다. 작가는 “종교가 이 사회에서 얼마만큼 유효한가를 고민해보았다.”고 말한다. 관람객은 일상적 풍경을 통해 종교의 믿음이 실제로 가능한지 의심하게된다.




김군의 자기소개서, single channel video, 6분25초, 2015 

박군의 자기소개서, single channel video, 7분54초, 2015



정군의 자기소개서, single channel video, 7분08초, 2015



정치, 종교에 이어서 작가가 유효성 혹은 무능력함을 재어보는 사회적 요소는 ‘취업난’이다. 작가는 <자소서>시리즈를 통해 ‘취업’문제를 조망한다. 이 작업은 타이포 영상작업으로 위쪽에는 검은 배경이, 아래쪽에는 흰 배경이 보인다. 검은 배경에는 흰 글씨로 누군가의 ‘자소서’ 텍스트가 나열된다. 흰 배경에는 검은 글씨로 ‘자소서’ 혹은’ 취업’에 관련한 서적의 제목이 나열된다. 이 전시에서는 각각 정군, 박군, 김군의 자소서가 같은 형식으로 상영되고있다. 영상 속 자소서 내용은 우스꽝스럽게도 유사반복적으로 보인다. 자소서는 개성을 표출하는 글짓기인데 취업난은 점점 개성을 탈각시키고있다. 개인의 자소서는 관객과 일 대 일로 마주하면서 한 인간의 삶을 평가하는 ‘글’로 기능하지 못한다. 더욱이 나열되는 자소서는 취업에 실패한 이들의 것이다. 그들도 같은 서적을 보고 같은 틀에 의거에 글을 썼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실패한 자소서는 관람객에게 수용된다. 작가는 ‘취업’시스템(거시적 세계)의 문제점을 개인의 자소서(미시적 세계)를 통해 보여준다.


‘박윤삼’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크게 ‘정치’, ‘종교’, ‘취업’의 문제에 대해 묻는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한국사회문제전반의 이질적인 풍경으로 보인다. 그는 이미지 세계에서 ‘정치’, ‘종교’, ‘취업’ 문제를 변용시킨다. 작가는 어느경우에도 그 문제들의 참과 거짓을 따져묻지는 않는다. 단지 시스템의 작동방식, 환경이 올바른지 묻고 의심한다. 작가가 축적의 여러방식(예를 들어 영상, 사진, 오디오 즉, 매체)을 통해 보여준 ‘거시적’ 세계의 비가시적인 문제는 왠지 모두 ‘무능’해보인다. 흥미로운점은 ‘정치’, ‘종교’, ‘취업’ 모두 어떤 ‘약속’이나 ‘믿음’에 관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불확실한 것이다. 개인은 그 세계에서 오로지 희망이라는 도박을 할 수 밖에 없다. 불확실한 약속은 시스템을 통해 보완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작가가 여러 이미지로 보여주는 한국사회는 그런 보완책마저도 불명확하다. 작가는 ‘대통령의 얼굴’이나 ‘종교건물의 속세적 풍경’을 제시하지만 그것은 어떤 문제점을 직접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단지 각 대상이 가지는 그 구조속의 시뮬라크르를 폭로하기 위해 기능한다. ‘박윤삼’ 작가의 작업은 무엇보다도 ‘삶’에 관련되어있다. 작가는 자칫 개인들의 삶을 망각하게될 거시세계의 사건들을 경계하고 있다. 그는 효과적으로 세계의 시뮬라시옹을 폭로한다. 우리는 그의 작업을 통해 희망이 비어버린 세계를 목도한다. 하지만 회의주의적 결론이 유도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관객들은 비판적 감각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사진출처 : 윌링앤딜링


 by. 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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