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랩스'

합정지구

2016.06.03-06.25


컬랩스-포르노

Collapse-Porno




곳곳에 재난의 포르노가 깔려있다. 특히나 좀비, 핵, 세균, 외계인을 원인으로 하는 ‘아포칼립스’ 서사는 우리에게 매력적인 소재로 다가온다. 파국으로 치닫는 가상의 서사를 탐닉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어쩌면 지금 심리적인 파국을 맞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외부에서 더 강렬한 파괴된 공간과 세계를 확인하려는 게 아닐까? 수많은 파괴의 위험은 카타르시스를 위한 소재로 간단히 사용된다. 매년 재난영화는 꾸준히 상영되지만, 실제 삶의 재난은 영화처럼 작동하지 않는다. 많은 재난영화는 재난에 대비하는 방법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재난영화는 주인공(선)과 재난(악)이 가정한다. 그리고 재난 속에서 동정심을 유발하는 인물로 주인공은 변화한다. 결국, 영화 속 재난을 주인공이 어떻게 해결하는지 우리는 지켜보게 된다. 사실 이 글은 재난영화에 대한 글이 아니다. 그런데도 영화를 통해 우리는 재난, 파국, 붕괴가 이미지로 소비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글의 목적이란 무엇인가? 바로 한 전시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 전시는 바로 합정지구에서 열린 기획전 ‘컬랩스’다. 이 전시는 소비되는 재난과 붕괴, 파국의 이미지를 응시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개인적으로 전시란 관람자에게 다른 시각을 알려주고, 가려져 있던 부분들을 인식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컬랩스’는 아주 효과적인 전시였다. 이 글은 ‘컬랩스' 전시를 통해 어렴풋이 붙잡게 된 소비되는 이미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제목이자 주제인 ‘컬랩스’에 대한 어원 분석[각주:1]과 작가에 대한 개별 스테이트먼트까지 이 전시는 기획자의 책임감이 짙게 풍기고 있었다. 나는 전시에 선정된 6명의 작가 각 작가와 작품의 행간에서 ‘컬랩스’라는 주제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크리스토프 르 비항, Art rock'n'roll consciousness, 우편봉투에 펜, 17x13cm, 2015


합정지구 1층의 쇼 윈도 쪽에서 ‘크리스토프 르 비항’의 <Art rock’n’roll consciousness>를 가장 먼저 보았다. 이 작업은 액자에 걸린 ‘종이봉투’가 전부다. 봉투 위에는 문구가 적혀있는데 ‘Le’이라는 조사를 통해 프랑스어임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스테이트먼트를 보기 전까지 그 문구를 알 수 없었다. 문구 하단부의 ‘kal marx’라는 이름을 통해 마르크스의 격언 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했지만, 의미는 계속 모호했다. 스테이트먼트에 의하면 작가가 봉투에 펜으로 적은 마르크스의 문구는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는 두 가지를 고갈시키는데, 그것은 노동자와 자연이다.’ 단순히 이 문구를 적었다고 해서 작가가 자본주의를 공격하거나 거부하는 제스쳐를 취하는 것일까? 중요한 것은 문구가 적힌 봉투였다. 이 봉투는 하나의 무대로 작동한다. 우편 봉투는 건강보험공단에서 발송되었다. 자본주의 내의 최소보장에 대한 우편봉투는 하나의 안정적인 틀로서 개인에게 부여되는 시스템을 상기시키고, 그 위에 작가가 휘갈긴 ‘마르크스’의 문구는 그 시스템이 안고 있는 필연적인 결함을 상기시킨다. 작가는 개인을 출발점으로 전체 시스템을 진단해보고자 한다. 모순을 안고 있는 제도 아래에서 사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크리스토프 르 비항’의 작업은 균열점이 은폐된 채 안정적이라고 생각되는 시스템을 다시 보도록 도와준다. 



이충열, 마트, 제도지 위에 펜, 100x122cm, 2009



이충열, 마트, 제도지 위에 펜, 100x122cm, 2009, 부분




이충열, 마트, 제도지 위에 펜, 100x122cm, 2009, 부분


‘크리스토프 르 비항’ 작가의 작업이 걸린 쇼 윈도와 맞닿아있는 벽에 ‘이충열’ 작가의 작업 <마트>가 걸려있었다. <Art rock’n’roll consciousness>가 개인 삶과 시스템을 결부시켜 모순을 제시한다면, <마트>는 구조 자체를 강박적으로 그려진 그림으로 보여준다. ‘이충열’ 작가는 제도 종이에 펜으로 간단한 건물의 외관을 그리고, 그 내부에 에스컬레이터와 마트 카트를 끄는 사람들을 그린다. 건물 안에서 행동하는 혹은 움직여지는 사람들은 규격화된 기호로 보인다. ‘카트를 미는 아빠와 그 손을 잡은 아이, 유모차를 미는 엄마와 거기에 타고 있는 아이’로 표현될 수 있는 이 기호는 무수히 많은 수로 그려져 있다. 이 기호가 상징하는 것은 바로 ‘4인 가족’이다. 질서정연하고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제도-건물 안의 가족-기호는 결국 ‘다 함께' 무너지는 모습으로 하단에서 끝난다.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전형적인 가족제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충열’ 작가의 가족-기호는 정해진 형태만을 따르도록 하는 우리의 제도-건물이 은폐하는 강박적 압박감을 가시화한다. ‘크리스토프 르 비항’ 작가와 ‘이충열’ 작가의 작업은 사회제도를 은유하고 우리가 만들어낸 ‘제도’가 붕괴하기 쉬운 균열 위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컬랩스’ 될 것들을 향해 눈 가리고 아웅 하고 있지 않은지 자문해보자.



성유삼, 버섯구름, 스폰지 폼, 2011


우리 삶의 제도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는 두 작가의 작업을 뒤로하고 1층의 ‘성유삼’ 작가의 작업을 마주하게 되었다. 스펀지로 재현된 버섯구름은 모순적이다. 버섯구름은 파괴의 상징이다. 하지만 ‘성유삼’작가의 스펀지는 작고, 푹신하게 이를 재현했다. 재앙의 기호는 단순한 외양으로 추락했다. 이는 우리가 재난, 멸망, 파국에 대해 가지는 태도를 짐작하게 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스크린 밖에서 안전하게 재앙의 기호를 보고, 느끼며, 안도한다. 핵폭탄이 수시로 터지는 전략게임이나 영화를 통해 우리는 실제 핵이 터지지 않았음을 안도한다. 이 작업을 보는 순간 나는 ‘보드리야르’의 핵에 대한 논의를 떠올리게 되었다. “우리 삶을 마비시키는 것은 원자폭탄에 의한 파괴의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라, 우리 삶을 백혈병 걸리게 하는 저지이다.”, “저지는 실제적인 핵 충돌 자체가 실재의 우발적 가능성으로서 기호 시스템에서는 미리 배제되어 버림으로부터 온다. 모든 사람은 이 위협의 사실성을 믿는 척한다.”, “핵에 의한 초토화의 위험은, 무기를 첨단화 함으로써 안전, 차단, 통제의 보편적 시스템을 설치하기 위한 핑계로 사용될 뿐이다”, “오늘날 사회의 팽창을 지배하는 것은 극대의 프로그램적인 완전무결성과, 안전과, 저지와 동일한 모델이다. 여기에 진짜 핵의 부차적 영향이 있다.” 핵이 하나의 저지 시스템으로서 개인을 사회화하는데 동원된다고 말하는 ‘보드리야르’의 논지는 ‘성유삼’ 작가의 작업을 통해 시각화된다. 그러나 만지고 싶을 정도로 스펀지의 촉감을 잘 전달하는 버섯구름 조각은 영화와 게임 속 이미지와는 달리 스펙터클이 아니다. 따라서 똑같은 통제 아래의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재앙의 기호를 매료되지 않은 채 볼 수 있다. 



강신대, 파국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9분 55초, 2016

사운드 : 해미 클레민세비츠 / 영상 디자인 : 원준경




강신대, 파국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9분 55초, 2016

사운드 : 해미 클레민세비츠 / 영상 디자인 : 원준경


’성유삼’ 작가의 작업은 지하층의 강신대 작가의 작업과 이어진다. 사실 ‘강신대’ 작가의 작업이 제시하는 바는 간결했다. 파국에 치닫는 모습이 진행되다가 유튜브에서 다음 영상으로 넘어가는 로딩 장면이 나타난다. 이것을 9분 55초 반복하는 작업 <파국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컬랩스’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소비하는 태도 그 자체를 시각화한다. ‘성유삼’ 작가와 ‘강신대’ 작가의 작업은 소비되는 이미지를 뚜렷한 기호(버섯구름)와 방식(반복)으로 보여주었다. ‘연미’ 작가는 더 나아가 신문이라는 매체 안에서 파국의 이미지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검토한다. 신문에 연신 보도되는 ‘충격’적인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지치지 않고 파국에 치닫는 다른 세계의 모습을 보급한다. 작가는 신문 일부를 연필로 지우는 ‘최병소’ 스타일의 작업 방식을 차용하는 것 같지만 결과는 확연히 다르다. 최병소 작가의 작업이 신문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제스쳐로 보인다면, ‘연미’ 작가의 작업은 신문의 이미지만을 도드라지게 만들어 매체 자신을 스스로 공격하게 한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나 흥미로웠던 점은 <파키스탄 들여다보기>와 <국제화>라는 작업이었다. 3개의 작업으로 나뉘는 <파키스탄 들여다보기>에서는 오사마 빈라덴의 이미지만 드러난 채 나머지 내용은 모두 삭제되어있다. 2개의 작업인 <국제화>는 2009년도와 2015년도의 신문 위의 글자를 끊이지 않도록 연결하는 중간 도형이 그려져 있다. 두 시리즈가 병치 되어있을 때 <국제화> 작업은 마치 파키스탄의 신문처럼 보이게 되고, 오사마 빈라덴의 이미지에 대응하는 글자로 보인다. 마치 아랍어처럼 보이는 그러나 실은 어떤 의미도 없는 한글의 변형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참극의 포르노를 보게 된다. 




연미

왼쪽부터

파키스탄 들여다보기, 신문에 드로잉, 54x39cm, 2011

파키스탄 들여다보기, 신문에 드로잉, 54x39cm, 2011

파키스탄 들여다보기, 신문에 드로잉, 54x39cm, 2011

국제화, 신문에 드로잉, 54x39cm, 2009

국제화, 신문에 드로잉, 54x39cm, 2015




국제화, 신문에 드로잉, 54x39cm, 2009

국제화, 신문에 드로잉, 54x39cm, 2015



‘연미’ 작가의 작업에서 신문이라는 미디어 권력에 결부되는 ‘컬랩스 된 것'에 대한 소비는 ‘플로리안 골드만’ 작가의 작업을 통해 실제 세계의 강박적인 재난 공포로 물질화된다. <Tokyo will Occur Someday> 작업은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다. 이 작업은 15분 50초 동안 후쿠시마 사고 이후 일본의 방재박람회를 카메라로 스케치했다. 나는 일본의 재난에 대한 이미지 소비가 굉장히 특수하게 자리 잡았다고 생각한다. 흔히 볼 수 있는 고지라, 에반게리온 같은 수많은 일본의 문화생산물들은 거대한 재난을 상징화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도호쿠 지진 이후 재난에 관련된 내용이 대다수 제지된 것을 보면 역시나 직접적인 연상은 회피하려고 하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여전히 상징화된 연상으로 ‘컬랩스’는 우리 곁에 잠재해있다. 상징화된 연상은 <Tokyo will Occur someday>에서는 재난 시뮬레이팅으로 보인다. 방재박람회를 추적하는 작가의 방식은 완전한 장면보다 파편을 수집하는 행위였고, 선형적인 내러티브 없이 영상으로 스크랩했다. 외부자인 작가의 입장과 달리 일본인들의 방재박람회에 대한 태도는 진지해 보인다. 많은 장면 중 개인적으로 인상 깊은 장면은 흔들려도 떨어지지 않게 고정하는 장치와 무너지지 않는 건물을 전시하는 것이었다. 일상으로 스며드는 ‘컬랩스’의 공포는 거대한 박람회라는 형식을 빌려 스펙타클한 이미지를 가진 영화와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잠시 안도하게 하는것은 아닐까? ‘일본인’들이 가진 공포와 달리 ‘한국인’의 공포는 어떠한가? <Damage Control> 작업은 바로 이것을 꼬집는다. 조금의 과장을 보태서 말하자면 이 작업은 충격적이었다. 차의 문이 서로 부딪히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파란 스펀지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스펀지는 많은 점을 시사한다. 대다수의 사람은 이 스펀지에 대해 타인의 차량을 배려하는 조치라고 생각한다. <Damage Control> 작업에서 알루미늄 시트는 스펀지가 붙어있는 곳을 따라 찌그러졌다. 이런 형태는 사고에 대한 과도한 강박적 조치를 보여준다. 또한, 스펀지는 차의 손상으로 인해 겪어야 할 손해배상에 대한 공포를 암시하기도 한다. 결국 스펀지는 일종의 좌표로서 공포가 응축되는 지점이다. 우리는 일상의 사고-컬랩스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플로리안 골드만, Tokyo will Occur Someday, HD Video, 15:50, 2016


플로리안 골드만, Tokyo will Occur Someday, HD Video, 15:50, 2016



플로리안 골드만, Tokyo will Occur Someday, HD Video, 15:50, 2016



플로리안 골드만, Tokyo will Occur Someday, HD Video, 15:50, 2016



플로리안 골드만, Tokyo will Occur Someday, HD Video, 15:50, 2016



단순히 판단하는 것에는 항상 오류가 따르기 마련이지만 전시의 작업을 두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첫 번째로 ‘컬랩스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검토하는 작업’이 있다. 여기에 해당하는 작가는 ‘크리스토프 르 비항’과 ‘이충열’이다. 두 번째는 ‘컬랩스가 어떻게 잘못 재현되고 있는가 제시하는 작업’이다. 여기에는 나머지 네 명의 작가를 모두 포함할 수 있다. 결국, 컬랩스의 재현 방법과 재현 상태를 고민하는 이 전시는 포르노처럼 소비되는 ‘컬랩스’에 대해 조명한다. 사회, 심리, 물리적인 온 방향에서 일어나는 ‘컬랩스’ 때문에 우리는 무뎌지고 점점 부분적인 붕괴에 눈을 돌린다. 일상에서 소비하는 ‘컬랩스’는 바로 이렇게 작은 단면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 작가들은 서로 붕괴와 파국의 이미지가 어떤 상황에 부닥쳐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볼 것인지 점검한다. 작가들은 은폐된 균열을 시각화하고, 붕괴가 단순히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라고 제시한다. 하지만 구조적 진단을 위해 이 전시는 붕괴의 구조 자체를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또 다른 포르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전시의 작업은 도덕적 판단을 구조적 문제로 치환하기 위해 일상에서 흔히 마주하는 ‘컬랩스’의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전시에서 제시된 이미지는 모두 ‘컬랩스’에서 빗나가있다. 전시장에서 우리는 붕괴의 매혹적 이미지를 볼 수 없다. 결국 ‘컬랩스’ 전시는 심미화되는 ‘컬랩스’에 대한 이미지-텍스트를  메타언어적으로 분석한다.



플로리안 골드만, Damage Control - Risk Assessment, 

알루미늄 시트에 에나멜, 금속 선반 받침대, 대나무, 접착식 폼블럭,

120x55x110cm, 2016



플로리안 골드만, Damage Control - Risk Assessment, 

알루미늄 시트에 에나멜, 금속 선반 받침대, 대나무, 접착식 폼블럭,

120x55x110cm, 2016




by. 하마

  1. “전시 제목은 영문으로 ‘컬랩스(Collapse)’라 하였다. 국문으로 번역하면 붕괴라 할 텐데 그리 표기하지 않은 이유는 영문 단어의 구조에 주목하였기 때문이다. 라틴어 어원으로부터 그 의미를 분명히 살펴볼 수 있다. 컬랩스는 라틴어 컬랩수스(collapsus)를 기원으로 하는데 이는 콜라비(collabi)의 과거분사형이다. 여기서 콜(col)은 ‘함께(togehter)’라는 의미며, 라비(labi)는 ‘떨어지는 것(to slip)’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컬랩스는 ‘다함께 완전히 넘어진 상태’라 하겠다.” /// 전시 도록에서 발췌 /// 이 글에서도 붕괴, 파국, 재난에 해당하는 단어들은 ‘컬랩스’로 통일하겠다. [본문으로]

BELATED ARTICLES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