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환


‘단단하고 청결한 용기’ / ‘서늘한 평화, 차분한 상륙’


‘스페이스 윌링 앤 딜링’ / ‘MRGG’


3월 / 8월




조각적 망상과 초록물질들


 ‘변상환’ 작가의 3월 개인전 ‘단단하고 청결한 용기’를 보면서 놀랐다. 무엇보다 전시공간을 점거한 초록 물질의 내부와 외부가 서로 반대되는 속성이며, 이로 인해 그 물질의 무게감이 가장되어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변상환’ 작가의 작업은 작년 ‘지금 여기’의 기획전과 ‘굿-즈’에서도 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2016년 3월 개인전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시장에 표류하고 있는 초록 물질을 볼 수 있었다. 그 이후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8월에 ‘변상환’ 작가의 개인전이 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보러 가게 되었다. 5개월의 시차를 통해 초록 물질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했다. 분명 같은 구성요소로 제작된 그 물질은 3월과 8월에서 각각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 아니 그 전에 초록 물질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단단하고 청결한 용기' 전시 전경



3월의 기억

3월에 보았던 전시장의 풍경은 모래와 그 위에 얹혀 표류된 듯한 초록 물질로 채워져 있었다. 작가는 전시장에 비치된 스테이트먼트 속 글에서 용기容器(bowl)를 용기勇氣(Courage)로 착각한 우연한 언어게임 그리고 한국인이 살아가는 건축물의 옥상을 덮고 있는 우레탄 방수액의 ‘초록빛’에 대해서 말하며 전시의 맥락을 이야기한다. 초록 물질에 대해 분석하기 전에 먼저 전시장의 배치를 되돌아보자. 공간 안에는 홍수가 나면 전시장에 있는 작업이 도움되지 않을지 묻는 작가의 글을 구현하듯 모래로 가득했다. 모래는 초록 물질이 표류하기 위한 배경으로 설정되어 전시장으로 유입된 것으로 보였다. 전시장 안에서 크게 세 가지의 색이 두드러졌는데, 벽의 ‘흰색’, 우리가 흔히 보는 ‘모래색’과 조각작품의 광택나는 ‘초록색’이었다. 화이트큐브의 벽과 그 색은 세계와 전시장 내부를 분리해 작업에 더 강력히 몰두하도록 하는 장치임이 자명하다. 그리고 모래란 분리된 세계 안에 표류의 망상을 가능하게 한다. 게다가 모래는 후술할 초록 물질의 성질을 정당화해주는 배경이 된다. 모래는 분명히 초록 물질이 가장하는 모든 속성을 정당화하는 물리적인 장(field)이다. 전시장에는 벽돌을 엮은 것, 거대한 돌, 작은 돌, 소주병, 거대하게 확장된 용기(bowl)의 손잡이 끝부분이 나뒹굴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홍수가 난다는 망상 따위가 아니었다. 전시를 다시 돌아보면서 우리는 작가가 얼마나 조각적으로 망상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무제>, 플로럴 폼, 옥상방수 우레탄, 142x25x40cm, 2016



‘단단하고 청결한 용기’ 전시를 보면서 초록 물질의 소재를 무척이나 궁금하게 생각했다. 소재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초록 물질을 작업으로 바라보기 위해서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초록 물질을 전시장에서 돌의 형태를 가장 많이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돌로 예시를 들어보자. 우리가 아는 돌덩이는 외부와 접촉하는 접촉면과 감춰져 있는 내부가 동일시되어있다고 가정된다. 그러나 전시장에 있는 가장된 돌덩이는 내부와 외부의 물질이 다르다. 초록 물질에 발린 우레탄 방수액은 내부의 물질이 가지는 모든 속성을 자신의 색과 질감으로 차단한다. 마치 옥상을 점령하고 있는 오늘날의 모습처럼 말이다. 그렇다 이 색은 한국 건축물 옥상이나 주차장 같은 장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색이다. 초록 물질을 덮고 있는 우레탄 방수액이 차단하는 것은 바로 ‘플로럴 폼’이다. 플로럴 폼은 가볍고 잘 깎여나가며, 물에 잘 젖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작가가 다양한 모양으로 깎아낸 ‘플로럴 폼’은 ‘우레탄 방수액’으로 뒤덮인다. 침수성은 방수액에 의해 소외된다. 사실 우리는 우레탄 방수액이 제 기능을 하는지 안 하는지 관심이 없다. 우레탄 방수액의 성질은 플로럴 폼의 성질을 가릴 때 의미를 가진다. 앞서 말했듯이 플로럴 폼은 기능 면에서도, 속성 면에서도, 시각적인 측면에서도 우레탄 방수액에 의해 부정되었다. 그리고 우레탄 방수액도 본연의 기능을 전시장에서 발휘하지 못한다. 그렇다 이 물질들은 사물의 기능을 상실했다. 이제는 무언가 다른 세계로 연결되어 작동해야한다. 



<Stone Age>, 플로럴 폼, 옥상방수 우레탄, 2016


‘변상환’작가의 관심은 ‘동시대에 걸쳐진 것’ 혹은 현재에 존재하지만 기억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현실의 작동원리에 속하는 게 분명하지만, 대중의 관심사에서 멀어졌거나 관심을 가질만한 화두가 되지 못하는 것들일까. 동시대에 걸쳐져 존재하지만 잊혀지고 기억되지 못하는 어떤 ‘사물’이 있다면, 그 사물은 어떻게 작업으로 소환되는지 물어야 한다. 계속 이야기했듯이 초록 물질들을 통해 소환하는 것은 명백히 건축물 옥상이나 어딘가의 바닥에 발린 우레탄 방수액이다. 초록 물질들의 구성방식을 살피면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잊힌 것이라는 모순적인 사물임을 알 수 있다. 일단 우레탄 방수액이 발린 겉부분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내부의 플로럴 폼은 감춰져 있다. 플로럴 폼은 언어화해서 확인하지 않는 이상 증명할 수 없다. 초록 물질의 껍질은 녹색의 방수액이 발린 모든 풍경과 연관된다. 가려진 또는 잊힌 플로럴 폼은 녹색의 방수액의 현주소를 상징한다. 방수액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가까운 과거를 상징하는 일련의 초록 물질은 현재 존재하는 부분(초록 물질의 껍질, 방수액이 발려있다는 사실)과 잊힌 부분(초록 물질의 내부, 인식대상으로 고려되지 못하는 방수액) 모두를 품고 있다. 



<Nowhere>, 플로럴 폼, 옥상방수 우레탄, 60x35x63cm, 2016


초록 물질을 조각 혹은 예술로 취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작가의 망상대로 홍수가 나야 할까? 그것도 좋겠지만 ‘조각’이라고 지칭하고, ‘예술’이라고 명명함으로써 우리는 이 패배한 사물을 부활시킬 수 있다. 이것은 초록 물질을 예술로서 간편히 취하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 조각이 예술의 맥락 안으로 들어오는 상황을 주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각이라고 상정한 초록 물질에 관해 이야기하자. 전시장 안의 조각들은 분명 우레탄 방수액에 의해 가짜 무게감을 가지게 된다. 앞에서 모래는 물리적인 장이라고 설명했다. 조각은 모래 위에 얹혀져 중력의 효과를 가장한다. 정확한 무게를 가늠할 수 없지만, 조각들은 실제 무게와 달리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 가벼워 보이지 않는 조각이 망상대로 이용된다면 어떨까? 3월 전시장에서 예술이 되기 위해 초록 물질은 무언가를 발설하거나 거부해야 한다. 첫 번째로 초록 물질이 실제 사물의 외형을 재현한 결과인 동시에 작가의 구성방식에 따라 다른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폭로된다. 재현한 대상 사물의 기능을 거부함으로써 초록 물질은 전시장에 놓인다. 두 번째로 그 과정에서 획득한 기능(방수)을 다시 한 번 거부하는 과정이 이루어진다. ‘단단하고 청결한 용기’ 전시에서 작업은 상대적으로 넓은 공간에 표류한다는 인상이 강했고, 작업의 비중은 8월의 전시에 비하면 공간 안에서 상대적으로 적었다. 작가가 이것을 염두에 두어 다음 전시에 변주를 주었는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8월의 전시에서는 공간도, 작업도 그 밀도와 비중이 높아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Maxlife>, 플로럴 폼, 옥상방수 우레탄, 184x184.5cm, 2016


<Maxlife> 부분


8월의 기억

사실 이 글에서 집중하여 리뷰하려는 전시는 8월의 ‘서늘한 평화, 차분한 상륙’이다. 초록 물질을 조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이 글은 ‘단단하고 청결한 용기’를 언급했다. 3월 전시에서 조각이 자신의 물리적 조건을 위배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면, 8월 전시에서는 물리적 현상을 거부한다. MRGG라는 전시장 안에서 거부된 것은 다름 아닌 ‘중력’이다. 지난 전시에서 중력이 거짓으로 꾸며진 것과 다르게, 8월에서 작가는 중력을 비웃는다. 3월의 작업에 비해서 8월의 작업은 확실한 끝맺음이 있었다. 이 끝맺음은 작업 자체의 기하학적 형태보다는 3월 작업의 꾸며진 무게감을 다시 폭로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전시장은 좁았다. 앞서 말했듯 작품은 공간안에서 3월의 전시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서늘한> 작업이 천장을 따라 설치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입구의 천장과 <서늘한> 작업은 연결되어 있었는데 모두 우레탄 방수액이 발려있었다. <서늘한>의 내부는 여전히 플로럴 폼이었고, 여전히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작품은 초록색으로 칠해진 시멘트 기둥처럼 보였다.



'서늘한 평화, 차분한 상륙' 전시 전경


이렇게 천장에 거꾸로 세워진 듯이 설치된 작업은 또 다른 기능 불능을 마주치도록 돕는다. 이번에는 우레탄이 자신의 기능을 완벽히 상실한다. 정확히 말해 공간에 의해 제공된 기능이 아니라 우레탄 방수액 본연의 기능을 잃는다. 3월의 전시에서 초록 물질을 조각으로 인식하기 위해 우리는 플로럴 폼의 차단된 속성에 의해 꾸며진 조각적 물성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8월의 전시에서 그 꾸며진 무게감 때문에 떨어질 것 같은 <서늘한> 작업은 제자리에 가만히 있다. 플로럴 폼을 차폐하면서 우레탄이 가장한 그 무게감과 중력은 거부되었다. 따라서 중력이 거부된 사실은 조각적 기능뿐만 아니라 우레탄 방수액 본래의 기능까지 폐기한다. 우레탄 방수액은 보통 중력에 의해 바닥으로 하강하는 비와 같은 액체를 차단하기 위해 칠해지기 때문이다. 우레탄 방수액이 칠해진 천장은 지난 전시의 ‘모래’에 가까운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도 여전히 물리적 장이 존재한다. 하지만 모래가 실제 물리적 현상을 통해 가짜-무거움을 구현한다면, 우레탄 방수액이 칠해진 천장은 물리적 현상을 거짓 진술하여 가벼움을 구현한다. 지난 전시에서 스스로를 조각 작업으로 정당화한 속성은 이어지는 작업에서 폐기되었다. 3월의 작업과 8월의 작업이 일련의 시리즈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작업으로 존재하는 배경과 상황은 다르다.



<서늘한(Cool)> 


따라서 <서늘한> 작업은 분명 3월의 작업에 정면 대응한다. 그렇다면 <아일랜드>나 <평화>와 같은 작업은 전시장 안에서 무슨 역할을 할까? <아일랜드>는 섬 보다는 신전 지붕을 보는 느낌이다. 또한, 모핑을 통해 점차 위로 떠오르다 멈춘 것 같다. <서늘한> 작업이 기둥이라면, 이 신전을 떠받드는 것은 아닐까? <평화> 작업은 천 위에 비둘기의 이미지를 스텐실로 칠했는데, 역시나 우레탄 방수액이다. 흔히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을 고려하면 스텐실로 칠해진 실루엣은 ‘서늘한 평화’가 ‘차분하게 상륙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다시 언어게임에 집중해볼 필요가 있다. 3월 전시에서 ‘용기’라는 단어의 기표가 두 개의 기의(표명되는 순간 또 하나의 기표가 되는 기의) 사이에서 혼동되었던 것과 달리 8월 전시에서는 서늘한과 차분한이라는 두 기표(이미 표명되어있기에 기의 보다는 기표의 기능을 더 가지고 있다.)가 영어단어 Cool과 연결된다. 따라서 전시장 내의 <서늘한>은 모두 ‘차분하다’라는 속성을 동시에 지닌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 ‘차분함’은 물리적 무게와는 상관없는 ‘가벼움’이라는 속성을 구현한다. 이렇게 ‘구체적 지시대상’은 언어게임을 통해 분화되고, 끊임없이 의미를 유발하는 긴장 상태에 놓이게 된다. 특히나 8월의 전시에서 <아일랜드>와 <평화> 작업은 언어게임과 뒤섞이면서 <서늘한>이 무한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게 한다.




<서늘한>, 플로럴 폼, 옥상방수 우레탄, 42x42x85cm, 2016


우리는 <아일랜드>의 기둥인 <서늘한>은 <평화>라는 비둘기가 상륙하기 위한 지지대라고 망상할 수 있다. 그러나 3월 전시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말했듯이 망상은 중요하지 않다. 내러티브는 중요하지 않다. 다 쓸모없는 것이다. 3월 전시가 표류한 상황을 통해 옥상의 이미지와 그 잊힌 기능을 소환했다면, 8월 전시는 우레탄 방수액을 통해 옥상을 대하는 태도에 더 집중한다. 따라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큰 홍수가 있은 뒤 150일이 지나 방주는 아라랏산에 처음으로 상륙하였다. -만경창파(萬頃蒼波), 저 멀리 자그만 육지가 보이는 듯도 하다. 언덕위 작은 주택의 옥상초록이 보인다. 그 귀퉁이에 조금 더 높게 솟은 적벽돌 굴뚝도 보인다.” 전시장 안에서 망상을 해보자. 3월의 방주는 더는 표류하지 않고 어딘가에 상륙했다. 그 자그만 육지(<아일랜드>)는 신전의 모양을 하고 있다. 사실 <아일랜드> 작업이 완벽히 떠오른다면 신전이 아니라 주택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제 망상을 멈추자. 우리가 망상을 통해 읽어내던 사물-예술은 우레탄 방수액의 색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끊임없이 환기되고 소환되는 어떤 풍경-옥상-색-이미지들이다.



<평화(Peace)>, 스텐실, 옥상방수 우레탄, 85x120cm, 2016


5개월의 시차에서 한 맥락의 작업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이 글에서 짚어봤다. 작업은 차이보다는 선택적으로 변주되어 공간 속에 놓인다. 작가는 3월에서 ‘플로럴 폼’의 물성인 가벼움을 무거움으로 은폐하고, 전시장 위에 표류시켰다. 그리고 8월에 가짜-무거움은 중력의 거부를 통해 극복되고, 내부의 플로럴 폼의 속성(가벼움)이 다시 드러난다. 이렇게 은폐하고 폭로하는 과정 속에서 사물의 질서 속 우레탄 방수액과 플로럴 폼의 기능은 폐기된다. 둘은 서로 묶인 순간 사물일 수 없다. 따라서 초록 물질은 분명히 조각이 맞다. 이 리뷰에서 깊게 이야기하지 못한 것이 있다. 바로 조각 작업 각각의 형상이다. 그러나 개개의 형상보다 초록 물질을 조각으로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 아는 것이 더 중요했다. 미술이라는 제도 속에서 전시장에 설치되었다는 간편한 이유만으로 초록 물질이 조각이 될 수는 없었다. 이건 레디메이드가 아니기 때문이다. 초록 물질은 작가가 형성한 구조를 가진 물질이지만 그 이상으로 설치되는 환경과 맥락에 더 민감해 보인다. 초록 물질은 ‘변상환’ 작가의 조각적 망상의 결과물이다. 



<아일랜드>, 나무, 옥상방수 우레탄, 120x90x73cm, 2016


by. 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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