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민

어제의 파랑

사루비아 다방

2016.3.2-3.31

렌더링 - 회화




서론

회화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을 끊임없이 계속되어왔고, 지금도 산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것이 되돌아오는 부활의 과정은 흥미롭다. 어쩌면 그것은 시뮬라크르로서 실재라는 껍데기만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다. 회화의 위기란 지금도 계속될 수 있는 것일까? 이미 모든 위협과 살인충동은 ‘저지전략’에 의해 무마되었다. 지금은 모두가 동시에 살아있다. 모든 게 지금 파악될 때 우리의 시간은 소거된다. 회화에 접근하는 태도란 시각적 태도가 어떠한지를 진단하는 것으로도 정의된다. 수없이 많은 이미지의 홍수와 시각적 충돌은 인간의 시각문화에서 수용방식을 바꿨다. 변경된 태도는 ‘레이어’나 ‘렌더링’, ‘인코딩’과 같은 영상 편집 혹은 가상 시뮬레이팅 개념으로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시각 문화 체계는 ‘시뮬라크르’에 의해 대체되었고 그 환상의 끝은 ‘VR’일 것이다. 오늘날 회화에 관해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가상의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 실제를 환영적으로 재현하는 ‘매체’로서의 회화를 벗어나 가상의 가상으로서 기능하는 회화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여기서 질문하려고 하는 것은 ‘렌더링’이다. 나는 리뷰를 쓰면서 항상 질문을 던지고 답하고자 해왔다. ‘사루비아 다방’에서 열린 ‘정희민'  작가의 개인전 [어제의 파랑]을 보면서 나는 앞서 말한 ‘렌더링’으로서의 회화에 관해 고민하게 되었다. 오늘 이 글에서는 ‘렌더링’으로서의 회화제작 방식이 매체 자신을 어떻게 보도록 하는지 묻고 싶다.




<Frameshot 1>,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2016 사진 출처 - 네오룩



A. 중첩의 함의


렌더링에 대한 의문을 가시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시의 개별 작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희민'  작가는 유독 중첩되고 서로 충돌하는 전자처럼 느껴지는 회화를 그려내고 설치한다. 말 그대로 화면에서 중첩은 충돌이자 해체 혹은 혼돈으로도 보인다. 전시장 입구에서 보게 되는 <Frame shot1>은 파란 조명 아래 여러 층의 이미지가 걸려있는 모습이다. 꽃, 드로잉, 속도감 있는 빛의 화면은 각 레이어를 가진 채 실제 공간에 분할되어있으며 동시에 묶여있다. 더군다나 ‘전 세부적인 것 보다는 일반적인 것에 관심을 갖죠’라는 자막 같은 문장은 <Frame shot1>을 연속된 장면 사이의 포착된 순간으로 보이게 한다. 응집된 하나의 화면이 아니라 파편들이 날아와 꽂히는 화면을 작가는 구현한다. 전시의 도입부에서 관람객은 ‘중첩’을 인식한다. <Untitled>는 중첩된 이미지를 한 캔버스에 구현한 것이다. 직사각형의 이미지들이 겹겹이 연결되어있고, 계단같이 나열되어 판독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미지의 가장 끝에서는 ‘폭발’하는 듯한 장면이 보인다. 이로써 그 전의 이미지들도 하나의 폭발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다. 겹쳐진 폭발 이미지 위로 검은 선이 이리저리 그어져 있다. 폭발의 장면은 컴퓨터 디스플레이의 상태 창이 무수히 복제된 렉 걸린 화면 같기도 하다. 도대체 작가는 이런 ‘중첩’에 왜 집착하고 있는가? 정말 이것은 단순한 ‘겹치기’인가?




<Untitled> oil on canvas, 163x112.1cm, 2015



<Untitled> oil on canvas, 163x112.1cm, 2015 - 부분



<Frame shot2>에서는 여전히 ‘중첩’된 이미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캔버스는 바닥과 벽에 닿은 채 휘어져 있고, 세 개의 이미지가 캔버스 위로 겹쳐져 있다. 상대적으로 잘 보이는 풍경 이미지와 녹색 계열의 일그러진 색면 이미지, 흑백의 부분적인 이미지가 있다. 세 이미지는 갈갈히 찢겨 얹혀있다. 이 작업은 <Frame shot1>과 <Untitled>와는 무언가 다르다. 이 찢긴 나타난 이미지가 오늘날의 시각체계의 작동방식을 보여주는 예시가 된다. <Frame shot2>는 ‘렌더링’ 과정에서 구현 중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현상되어가는 중으로 나타난다. 중첩 이미지들을 통해 우리는 렌더링이라는 과정을 붙잡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찢겨진 이미지를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수용방식, 제작방식 또한 이해하도록 도울지 모른다. 넌지시 말하자면 ‘저자’는 ‘편집자’가 되어가는 것이고 직접 이미지를 수정하는 게 아니라 가상의 프로그램 툴로 수정해야 한다.




<Frameshot 2>, oil, acrylic and spray paint on canvas, 140x145x71cm, 2016



<Frameshot 2>, oil, acrylic and spray paint on canvas, 140x145x71cm, 2016




<Frameshot 2>, oil, acrylic and spray paint on canvas, 140x145x71cm, 2016 부분


앞의 세 작업만을 가지고는 직접 디지털 이미지의 혼재된 풍경을 인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 불가능성이 바로 그 이미지의 속성이다. 이것은 ‘다가오는 중'이기에 고정돼서 나타나지 않는다. 중첩된 이미지들의 층위는 더는 구분되지 않는다. 데이터 조각들은 하나의 존재를 최소단위로 분절하여 이동하도록 한다. 물리적 실재에서는 전혀 가능하지 않은 이 방식들은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체계를 더 효과적으로 이용한다. ‘정희민'  작가의 중첩전략은 실제로는 분할작업 아니 다시 말해 소환작업이다. 디지털 이미지를 분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미세한 가상들을 그러모아 현실로 꾸며내는 것이다. 시뮬라크르는 실재보다 더 실재 같으므로 ‘정희민'  작가의 작업이 단순한 회화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회화의 폭력적인 권위주의적 속성을 와해시키기 위해서 회화작업을 오브제로 취급하고 다른 매체와 물리적으로도 중첩한다. 결국, 이런 재현과 구축방식이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질적인 표현방식과 이미지들을 충돌시키는 일은 오늘의 이미지 환경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영으로서 우리가 이미지를 수용하는 방식과도 관계”된다.


 B. 변화된 시각 체계 속 ‘회화와 제작자’


이미지를 수용하는 방식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 앞에서 조각난 데이터의 소환과 퍼즐 맞추기 혹은 P2P로 대변되는 데이터 직조를 가지고 이 글에서는 이미지의 구현된 시뮬라크르를 설명했다. 이것을 좀 더 자세히 표현하는 작업은 <어제의 파랑>이다. 전시제목과 같은 이름을 가진 이 작업은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다. 회화, 프린트된 이미지, 오브제의 매체들은 서로 중첩되어 있다. 벽면 전체에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바로 호숫가의 이미지가 분절된 작은 사이즈의 이미지들에 의해 겹쳐져 가는 이미지이다. 이것이 바로 렌더링 되어가는 화면이다. 그러나 벽면의 이미지는 멈춰있다. 여기서 멈춰있는 이미지를 충돌시키기 위해 작가는 오브제 간의 관계를 두드러지게 설치한다. 같은 이미지지만 액자에 끼워져서 튀어나온 프린트와 회화작업, ‘즐거움’이라는 문구가 바로 ‘가상성’의 기호들이다. 중앙의 회화에는 다른 이미지들이 중첩되고 더해져서 혼재된 풍경을 생성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회화가 단일체가 아닌 분열된 데이터이자 그 데이터마저 연속해체가 가능한 것으로 존재하게 됨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무수히 해체되는 데이터-이미지는 동시에 무수히 조립될 수 있다. 변화된 이미지 수용체계에서는 고결하고 영원한 단일체로서의 ‘예술작품’을 인식하게 하는 게 아니라 무한히 나뉘고 분절된 가상성의 조각들을 통해 ‘편집’이라는 과정을 인식해야 한다.




<어제의 파랑>,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2016


















<어제의 파랑>,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2016 - 부분



<어제의 파랑>,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2016 - 부분



편집의 무한한 가능성은 한 버튼으로 색을 바꾸고, 이미지를 변모시키는 디지털 가상 프로그램적인 절차로 완성된다. <어제의 파랑>에서의 ‘즐거움’이라는 문구가 바로 이미지 수용 방식이 수용자에게 부여하는 ‘감정’이다. 무수히 분산되어 빠르게 소비되는 이미지는 시각을 만족하게 하는데 힘쓴다. 그것은 정신 분열적인 이미지 조각들로서 빠르게 지나쳐지는 간판 이미지를 읽을때와 같이 가만히있지 않는다. 시각적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구성된 이미지들은 납작해져 어느 때보다 더 실제로 다가온다. 과거의 고결한 ‘미’의 이론과 ‘쾌’의 이론들은 무용지물이 되어 껍데기만 남는다. 그 껍데기를 조종할 때 우리의 ‘즐거움’이 탄생한다. 그것은 시뮬라시옹된 ‘쾌’이다. 이 ‘즐거움’의 공허한 속성은 어디서 나타나는가? 바로 그 이미지 자체의 ‘공허’에서 나타난다. 이렇게 시뮬라시옹된 이미지와 즐거움을 가지고 과거와 같은 방식의 예술을 지속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회화라는 매체는 어떻게 ‘지속’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변화된 시각-이미지체계의 지평을 고민하는 동시에 수용자와 편집자의 위치를 고민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미 그래픽 처리자의 위치를 기계에 뺏겼다. ‘정희민'  작가가 회화를 ‘고민'하는 것은 그 자체의 담론을 위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잃어버린 지위에 대한 향수와 더불어 회화에 지금과 여기의 시각-이미지체계를 입력하고자 하는 ‘고민’이 아닐까?



<어제의 파랑>,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2016 - 부분


변화된 시각-이미지 체계는 저자라는 지위를 나락에 떨어뜨리면서 동시에 편집자와 2차 창작자와 같은 부류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뺏긴 위치를 감추려는 욕망이 회화매체 속에 잔존한다. 따라서 단순하게 이미지를 중첩하는 일로 변화된 시각-이미지 체계를 보여주기는 힘들어 보인다. 자기의 잃어버린 위상을 향수하면서 동시에 현주소를 기재하는 일, 번지 주소와 도로명 주소를 함께 쓰는 것 같은 일에서는 ‘전자’와 ‘후자’의 우선순위에 따라 문제의 두드러진 부분도 달라진다. 회화는 실제를 물감이라는 질료를 통해 캔버스 위에 환영적으로 ‘재현’해왔다. 그러나 환영적 면모는 쉽게 ‘사실’처럼 꾸며지고 보인다. 물감과 캔버스의 종합으로서 현실에 소환된 이미지는 오브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상의 화면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복잡해서 인식 불가능한 매개재인 ‘기계’를 가지고 있다. 데이터를 직조해서 맞춰가는 이미지의 퍼즐은 어떻게 보아도 즐거운 놀이로 보인다. 물감을 바르고 구현하는 촉감적 회화표면은 자체의 물성으로 인해 미완성의 상태를 불안정하도록 만든다. 예술이란 완성된 계획으로서 공개되어야만 했었다. 그러나 편집자로서 그나마 자신의 기능을 박탈당한 오늘날의 인간에게는 ‘미완성’이 곧 완성이다. 끊임없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주시하는 것을 하나의 ‘완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모든 정보는 흐른다. 이렇게 퍼즐은 맞춰지는 동시에 자기를 복제하여 다른 곳으로 밀어낸다. 그래픽 처리자는 구현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렌더링’은 -내가 아닌- 장치의 능동적 활동을 지칭한다. 주체의 의식은 기계의 위치에서 능동적이라는 착각을 통해 사라진 자기의 지위를 메꾼다.




<Wall 4> oil and spray paint on canvas, 100x80.3cm

<Detail.psd>, arcylic on canvas, 97x130.3cm - 사진출처 네오룩



<Wall 4> oil and spray paint on canvas, 100x80.3cm

<Detail.psd>, arcylic on canvas, 97x130.3cm




C. 잃어버린 풍경과 직조된 이미지

‘정희민'  작가의 작업은 시각체계의 현주소에 대한 풍경화로 보인다. 이 풍경은 과거의 이상화된 화면이 아니다. 온갖 데이터가 입주한 ‘데이터베이스’에서 작가/편집자는 이미지를 꺼내 풍경을 직조한다. ‘정희민'  작가는 정말 회화를 ‘그리고 있는 것’일까? 이 전시의 회화 속 이미지는 아무 의미도 가지지 않고 있다고 이 글에서는 넌지시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미지는 단일 기호로서 의미가 있기 보다는 하나의 문맥 속에  배열되면서 보이지 않는 데이터 체계의 ‘풍경’을 시각화할 가능성을 얻게 된다. <Detail.psd>는 포토샵 확장자와 ‘세부’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이 작업은 포토샵 프로그램에서 최소 픽셀 단위를 살필 때 나타나는 ‘그리드’를 재현하고 있다. 그리드 안에 채워진 색들은 P2P를 통해 서서히 소환되는 데이터를 짜 맞춰나가듯이 직조되고 있는 것 같다. 하나의 ‘픽셀’은 최소단위의 이미지 데이터로서 표상되고, 컴퓨터의 처리 방식을 통해 화면으로 투입된다. <Detail.psd>는 <Wall4>라는 회화작업의 바로 뒤에 겹쳐져 걸려있다. 픽셀 단위로 직조되는 <Detail.psd>의 화면이 <Wall4>에서 나타나는 혼재된 이미지로 나타나는 게 아닐까? 픽셀로 모인 이미지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데이터 세계에서 이미지는 전달된 만큼 항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픽셀들의 기입을 통해 직조되는 순간의 모든 이미지가 그 자체로 완성된 이미지이기도 하다.





<Detail.psd>, arcylic on canvas, 97x130.3cm - 부분



<Detail.psd>, arcylic on canvas, 97x130.3cm - 부분



<Detail.psd>, arcylic on canvas, 97x130.3cm - 부분


다시 글의 의문점인 ‘렌더링’으로 키를 돌려보자. 회화에서의 ‘렌더링’은 기존의 의미보다는 데이터베이스를 거친 CPU-뇌의 컨트롤에 의해 최소 단위가 직조돼가는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 처리방식은 이 과정을 그 자체로 수행할 수 없다. 그것에는 0과 1의 연산과정이 내재하여있고, 우리는 그것의 처리된 이미지를 보는 것이다. 회화와 디지털 가상이라는 완전히 다른 매개자는 이미지를 구성하는 방법부터 다르다. 디지털 가상의 풍경은 ‘공허’하다. 회화라는 늙은 고집쟁이가 변화된 체계를 새기기 위해서는 ‘정희민' 작가와 같은 고민이 필요해보인다. 시각체계의 변화된 현재가 결국 회화 자신에게 새로운 역할을 위임할 수 있는 것이다. 데이터의 흐름을 핀셋으로 고정하고, 이미지를 단일한 위상의 작업이 아니라 점증적인 문맥으로 진단하고, 공허한 가상 풍경의 신호를 받아들이는 분산적인 과정을 생각해보는 일이 필요하다. 과거의 풍경은 없다. 어제의 파랑도 없다. 오로지 오늘의 ‘파랑’의 가장된 신호가 우리에게 한 발짝씩 다가오고있다.



<어제의 파랑>,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2016 - 부분


이 글에서 누누이 이야기하듯이 이미지와 이미지가 짜이는 디지털 가상의 직조된 풍경은 0과 1의 반복된 연산처리다. 그러나 이를 시각적 정보로 구현하는 가상세계의 가상적인 가상화는 ‘정희민' 작가에게 시각 체계의 수용, 편집 문제가 된다. 가상의 렌더링(시뮬레이팅)과는 다른 실재의 렌더링(회화)은 물론 같은 효과가 있을 수 없다. <어제의 파랑>에서 회화에 대한 노트를 회화로 다시 재현해낸 것은 작품의 다른 기호들과 충돌하는 오류인 동시에 ‘회화’에 대한 고민을 내포하고 있다. 잃어버린 풍경과 지위에 대한 공허한 향수는 사라짐을 감추게 한다. 시뮬라크르 로서의 회화행위는 공허한 이미지를 '시각 문화' 전체로 확장한다. ‘렌더링’ 된 회화는 끊임없이 충돌하고, 삭제되고, 복사하고, 오려지는 데이터 세계를 지시한다. 그 이미지는 무의미할지라도 무의미의 ‘의미’를 추적하는 일이 중요해 보인다.



결론

이 글은 ‘중첩의 함의’, ‘변화된 시각체계 속 회화와 제작자’, ‘잃어버린 풍경과 직조된 이미지’라는 세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정희민' 작가의 회화작업과 디지털 가상 이미지의 연결고리를 찾고자 했다. 회화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매체 자체의 틀을 빗겨가기 위해 용어 선택을 달리하였고 가장 집중했던 개념은 ‘렌더링’이었다. 렌더링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이 글에서 최소 단위를 직조하는 행위로 정의되었다. ‘정희민' 작가의 작업은 단순히 중첩과 반복으로 이미지를 응집시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디지털 가상 안에서 변화되는 ‘과정으로서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녀의 회화 이미지는 디지털 가상 이미지를 지시하고 있다. 중첩은 그리드에 픽셀 하나하나를 새기는 소환 작용이 된다. 이렇게 변화된 이미지 체계 내에서 어떻게 지각작용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정희민' 작가의 회화를 통해 돌에보게 된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정신 분열적이고 다층적으로 혼재된 형태를 가진다. ‘정희민' 작가는 회화에 관해 고민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매체 자체에 대한 나르시시즘적인 고민이 아니다. 오히려 회화를 디지털 이미지의 지시체로 사용함으로써 동시대 시각문화라는 거대한 장으로 발을 뻗는다. 회화 매체 스스로 디지털 가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회화에 다른 생을 부여한다. 그 생은 결론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이미지다. ‘정희민' 작가의 캔버스 위의 화면은 직조된 가상화면을 끌어온다. 디지털 매체에서 영상화면을 캔버스라고 한다면 이미지는 캔버스와 동시에 직조되어 나타난다. 징후적 현상이라기보다는 현재 상황을 진단하려고 하는 ‘정희민' 작가의 회화 작업은 디지털 이미지가 자기 스스로 인식 불가능한 곳에서 ‘회고’한다. ‘렌더링’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회화를 생각해보려는 시도는 어쩌면 매체 자체를 기능불능상태에 빠지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체를 변화된 체계 속에서 사유하지 못한다면 언제나 제자리걸음만을 하고 있을 것이다. 


by. 하마

BELATED ARTICLES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