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모자 

평범한 폭력

성북예술창작센터 2층

갤러리 맺음

2016.4.14-4.28


예술이라는 장치






전시 전경


서론

‘성’에 관련된 문제에서 이성애자 남성은 주체로 여성은 타자로 등장하는게 흔한 클리셰다. 우리는 이 고질병을 여전히 앓고 있다. 애석하게도 그 고질병은 점점 희석되어가고 있다. 성폭행은 상대를 강제로 제압, 소유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폭력과 위계로 유지하는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사회에서 단순한 힘은 은폐된 외연일 뿐이다. 그것은 때로 돈으로, 능력으로, 권력으로 변모한다. 따라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명한 간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와 대중에 의해 그들은 다른 양태로 변이된다. 우리는 흔히 가해자에게는 ‘이유’를 묻고, 피해자에게는 ‘행실’을 묻는다. 그것은 법, 도덕, 윤리적인 잣대들에 의해 각 상대자를 검증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가해자의 이유는 수사학으로 떡칠된다. 가해자의 심리와 주변상황 그리고 신체상태 등이 대표적인 수사다. 우리는 대부분의 피해자에게는 그의 행실을 지적하고 ‘당할만하지 않았냐’라고 추정한다. 물론 이런 가해/피해자에 대한 접근은 일반적이지 않다. 그러나 개인의 관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결국 미디어와 언론이 여론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준다. 시스템은 위계적 방식을 좀 더 자극적이게 소비한다. 



텍스트


가해자는 해체될 수 없을까? 내가 보기에는 ‘언니모자’의 ‘평범한 폭력’ 전시-프로젝트가 바로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들은 미술을 장치로 사용한다. 장치로 주어진 미술은 가해자의 평범성을 드러내고, 그들이 언제나 나타날 수 있는 산재된 존재임을 드러낸다. 이 전시-프로젝트는 사회의 수직적인 위계가 그대로 전사되는 미술계의 방식으로 가해자를 해체한다. 이 글에서는 ‘언니모자’의 프로젝트가 어떻게 가해자를 분해하는지 추적하여 독해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나는 이 글을 기존의 전시 리뷰와는 조금 다르게 서술하고자 한다. 우선 오늘의 글에서 우리는 ‘작업'에 대해서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할것이다.1)




전시 전경



[텍스트/작가/가해자]=>[이미지/작품/피해자]

본격적으로 글을 서술하기전에 전시에서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성폭행 피해자’가 ‘성폭행 가해자’를 묘사한 ‘텍스트’를 주목해야한다. 이 ‘텍스트’는 가해자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가 아니다. 그것은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고백하는 글이다. 고백글은 단순하지 않다. 언니모자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실제 성폭행 피해자의 사연을 모집했다. 이 사연은 기초 매체로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업인 2차매체로 이동된다. 피해자의 ‘텍스트’는 작가의 ‘이미지’로 재구성됐다. 매체의 이동과 재구성은 오늘 글의 전제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전시라는 형태와 출판이라는 형태가 연속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시 보면 이미지와 텍스트 기호를 각기 다르게 구조화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시는 다섯 명의 작가별로 작품을 나열했다. 가해자에 대한 텍스트가 순서의 기준은 아니다. 책에서는 각 텍스트 마다 어떤 이미지들이 작가에 의해 재구조화 되는지 알 수 있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굳이 ‘전시회’라는 형태를 선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가해자라는 ‘특별함’에 은폐된 ‘평범성’에 기존의 ‘특별함’(사건의 가해자로서, 정신적 약자로서, 죄인으로서.)과 다른 새로운 특별함(예술이라는 왕관)을 부여하는게 아닌가 한다. 새로운 특별함의 지위란 하릴없이 ‘특별’하지 않지만 가해자를 예술 이미지로 시각화할때 그의 평범성이 두드러질 출발선이 보인다.



Lather Clandestine(purple toothwort), 쥬나 리, 종이에 연필, 29.7x21cm, 2016


전시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실제로 이 전시는 놀랄만큼 따분하게 설치되어있다. 그러나 이 지루함은 실수나 오판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이것이 바로 ‘전략’으로 보였다. 나에게는 지루함 자체가 ‘흥미로웠다.’ 우리는 이 역설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 ‘지루함’을 ‘흥미로움’으로 전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텍스트에서 이미지로, 피해자에서 가해자로의 이동을 통해 실현된다. 이 전시전반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는 끊임없이 재현된다. 이 관계를 그려내기 전에 우리는 이 문단부터 가해자와 피해자의 도식을 바꿔야한다. ‘성폭행’에서의 가해자와 ‘언니모자' 전시에서의 가해자는 다르다. 성폭행 가해자를 서술해나간 성폭행 피해자가 전시-프로젝트에서는 가해자로 탈바꿈한다. 그러나 이들을 가해자로 명명한다면 오해를 빚기 십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서술자와 서술대상으로 독해하는게 좋을 것 같다. 이렇게 성폭행 피해자를 가해자-서술자로 전치했을때 ‘언니모자’가 전시- 프로젝트에서 작업으로, 전시로, 책자로 텍스트를 풀어낼 수 있는 길이 생긴다. 텍스트에서 이미지로, 작가에서 작품으로, 가해자에게서 피해자로의 이동고리는 일치한다. 이 고리는 남성중심적 미술사를 통해 정식화되어 왔다. ‘언니모자’는 이 전시를 통해 바로 그 미술사의 제도를 차용해서 ‘피해자’의 위치를 바꿔놓는다. 언니모자의 전시가 ‘지루한’ 전시형식을 전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유는 피해자의 이미지가 아니라 가해자를 구속하기 때문이다. 



연한 것과 아닌 것, 맥주, 종이에 수채, 31.9x41cm, 2016


가해자에 대한 법적, 사회적 고발이 아니라 ‘미술'이라는 고약한 체제안에서의 재현은 상당히 어려워보였다. 그러나 작가들은 자기들의 ‘능동적'인 권한을 ‘성폭행 피해자’에게 쥐어주었다. 출발점이 피해자의 서술이고 그 끝에는 가해자의 고발된 이미지만이 남는다. 이것은 분명히 가해행위에 대한 현명한 복수로 보인다. 그렇다면 가해자는 잃는 것이 있을까? 그는 ‘죄인’이라는 명명을 받지만 정신적으로 손상을 입지는 않는다. 피해자가 외상적으로, 정신적으로 피해를 입을때 가해자는 ‘성적 쾌락’을 얻는다. 그는 피해자에게 낙인을 찍고, 그것은 트라우마로 남는다. 흔적을 남기는 폭력적 권위들은 흔적이 남겨지는 피해자에게 앞서있다. 사실 그것은 그들이 더 가치있고, 선하거나, 유혹당해서 이루어 진게 아니다. 단지 하나의 이유만이 거기에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행동’이다. 전시장-작가-작품-유통 구조는 다분히 남성주의적인 수직구조로 이행되는 경우가 다분하다. ‘작가’와 ‘작품’의 관계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등식에 이어진다. 작가-가해자는 능동적 주체로서 ‘조장’되어있으며 작품-피해자를 제작한다. 따라서 이 전시에서 작가들이 성폭행 가해자의 이미지를 기입하는 행동은 또 하나의 ‘작품-피해자’를 재현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 작가들이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재현하는 이미지는 성폭행 가해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작가들은 실제 성폭행 가해자를 자신들의 작품-피해자로 치환한다. 성폭행 가해자의 ‘위계’적 질서는 이미지를 쥐어잡는 미술 가해자에 의해 부서진다.



untitled, 임이혜, 종이에 펜, 14.85x10.5cm, 2016


종합해보면 전시전반에서 재현되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는 대표적으로 세 가지다. 첫 째로 텍스트 서술에 의해 피해자들이 가해자에 대해 서술한 것이다. 성폭행 피해자는 텍스트 서술에서 성폭행 가해자를 ‘피동적’존재로 만든다. 두 번째로 성폭행 가해자에 대한 텍스트는 다시 이미지-피해자로서 작가에 의해 구성되고, 최종적으로 작품-피해자로 완성된다. 성폭행 가해자에 대한 텍스트(피해자)는 다시 한 번 짓눌리게 된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역전된 [작가-피해자-텍스트]는 능동적으로 [작품-가해자-이미지]는 피동적으로 된다. 우리는 여기서 피해자가 유리한 고지(남성미술제도를 통해 유지되어온)를 차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해자는 이미지이자 작품으로서 연쇄적 분해상태에 처한다.



아는 남자 3, 권순영, 한지 위에 혼합재료, 14.2x16cm, 2016



결론
이 글은 전시를 상세히 묘사하거나, 작업을 풀어서 서술되지 않았다. 전시-프로젝트의 ‘전략’이 차라리 묘사의 대상이라고 하는게 옳겠다. 어찌되었든 ‘언니모자’의 방법에서 전시의 형식이 중요한게 아니라 ‘전시’ 자체가 중요하다. 성폭행 사건과 미술 제도라는 두 가지 연쇄고리의 불명확함을 ‘언니모자’는 매끄럽게 연결한다. 그 연결고리는 글에서 계속해서 이야기한 ‘폭력, 권력, 위계’다. 수직적 질서로서 작동하는 성폭행과 미술 제도는 ‘언니모자’의 전략으로 와해된다. 그 전략의 특수한 지점은 바로 ‘저항’이다. 외부에서의 전복이 아니라 미술 제도 내부에서 그 제도에 ‘저항’하여 지루함을 흥미로움으로 바꿔낸다. 작가 개개인의 작업을 설명하지 않은게 실례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작업을 이해하는 길을 보여주고 싶었다. 남성으로서 이런 활동의 전략을 접하고 그것을 다시 서술하는 자체가 또 다른 수직적 질서는 아닌가 고민하게 된다. ‘언니모자’의 활동과 이번 ‘평범한 폭력’같은 전시-프로젝트는 가해자라는 특수한 존재들을 쪼갠다. 그 가해자는 이 글을 쓰고있는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즉 우리에게 언제나 가해자로 나타날 조건들이 충분히 내재되어있을 수 있다는 점을 ‘언니모자’는 일깨워준다. 사실 폭력의 평범성, 가해자의 평범성은 전시를 보는 개인을 지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나에게 이 전시의 궁극적인 의의는 성폭력과 같은 폭력의 문제를 도덕적이고 감성적인 기준에서 풀어나가기 보다는 외부의 장치를 통해 해결을 시도하는데 있었다.




untitled, 이정은, 캔버스에 유채, 50x50cm, 2016



untitled, 이정은, 캔버스 보드에 과슈, 30x30cm, 2016


1) 전시장에 비치된 인쇄물에 작성된 작가들의 작업 의도 


쥬나 리 

가해자들이 생존자들과의 사회적 관계와 감정에 기생한다는 것에 착안했다. 가해자들은 자신이 가진 권력이나 생존자들이 가진 신뢰를 놓치지 않고 이용하여 성폭력을 저지른다. 이러한 국면을 나타내기 위해 작가는 원고에 묘사된 가해자들의 외모를 토대로 그들의 얼굴을 기생식물의 이미지와 결합시켰다. 가해자들은 몰래 숨어있다 덤벼들고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관계에 기생하며 생존자들의 감정을 착취한다. 작가는 가해자들의 이러한 비겁한 생존 방식을 표현하고자 했다. 


맥주 

원고에 등장하는 가해자들이 매력적이라는 것을 첫 번째 주안점으로 두었으며, 두 번째로는 그들이 언제 폭력적으로 돌변할지, 어떤 순간을 약점으로 포착하여 치고 들어올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가해자들은 언제든 약자에게 휘두를 준비가 되어 있는 어떤 폭력성을 갖고 있으며 기회를 맞았을 때 활짝 열릴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상냥했던 가해자가 어느 순간 돌변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무엇인가 새빨갛게 부풀어 올라 촉수를 뻗는, 그러한 순간을 작가는 포착하고자 했다. 


권순영 

가해자의 '평범함'을 구현하기 위해 한국인 20대 남성 100명의 얼굴을 겹친 이미지를 사용하여 사실적이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적인 얼굴을 그려냈다. 가해자의 얼굴은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전형적인 악인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그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외양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작가는 그러한 평범함 위에서 생존자들이 기억하는 특유의 인상착의를 포착해내려 했다. 작품에서 보이는 가벼운 낙서의 형식과 사실적인 사진의 중첩은 평범한 얼굴 뒤에 숨겨진 이중성과 공격성을 나타낸다. 


임이혜 

성폭력 가해자의 스펙트럼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악마적인 모습만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며 작업에 들어갔다. 모집된 원고를 읽으면서 확신을 갖게 된 작가는 가해자를 표현함에 있어서 그들의 야비함과 비겁함을 중점에 두었다. 큰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장하고 있는 것이며 자신을 평범의 범주에 놓고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는 비겁자의 모습임을 묘사한 것이다. 더불어 작가는 원고에서 드러나는 생존자들의 감정을 충실히 반영하여 가해자들의 망령이 어떻게 들러붙어 있는지를 암시하고자했다. 


이정은 

10명의 가해자들이 묘사된 원고를 읽으면서, 피해자들이 겪은 폭력은 특수한 환경에서 겪는 비 일상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가해자의 외모와 성격, 그리고 폭력이 가해질 당시 상황을 묘사한 단어들을 토대로, 작가는 제3자의 입장에서 사건에 대한 상상력을 더하여 가해자들을 조명하였다. 언듯 보면, 8점의 드로잉과 2점의 회화는 일상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상황과 물체의 이미지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 번 더 들여다보면, 관객은 그 안에서 화려한 색채와 붓터치 너머의 불편함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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