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

합정지구

2015.8.14 - 9.5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 



노동하는 ‘나’를 자각시키는 ‘송곳’같은 이미지



노동한다는 것 그리고 노동자라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가지로 노동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노동’은 인간삶의 구체적 활동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은 크던 작던 노동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는 고소득에 육체적일이 아닌 것을 노동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자본의 고귀한 빛에 둘러싸여 ‘노동’의 차원에서 벗어난 환각적인 것이 된다. 힘든일만이 노동이 되어버린다. 모든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애석하게도 예술 또한 비노동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현상은 대중의 입장에서 시장에의해 선택된 ‘비싼’작품이 주는 거리감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사람들은 비단 미술 뿐 아니라 전반적인 예술을 노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멸시하지는 않아도 노동이라기 보다는 더 숭고한 어떤 행위, 결과물로 본다.


예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그것이 발전 기간 동안 쌓아온 숭고함에 의해 비춰지는 인식)과 달리 나는 예술만큼 특수한 ‘노동’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최근 이 점을 ‘정덕현’작가의 작업에서 볼 수 있었다. ‘정덕현’ 작가의 작업은 ‘노동’이라는 것에 대해서 추적하는 회화작업이다. ‘노동하는 예술가’라는 자각 즉, 인간이 본인의 노동을 자각하는 것은 예술에서 이루어진다. 앞에서 노동이 곧 삶의 구체적 활동이라고 말했기에 정덕현 작가의 작업이 노동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전반적인 삶의 형태들을 고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나는 정덕현 작가의 이번 전시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에서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노동하는 작가를 넘어선 동시대 한국에서 사는 사회구조속 부품이자, 자본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는 개인들의 초상이라고 본다. 



<장벽>, 종이에 먹, 호분, 아크릴 물감, 접시물감, 227.3x727.2cm, 2015년



<장벽>, 종이에 먹, 호분, 아크릴 물감, 접시물감, 227.3x727.2cm, 2015년



<장벽>, 종이에 먹, 호분, 아크릴 물감, 접시물감, 227.3x727.2cm, 2015년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 전시는 합정지구에서 열리고 있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두면의 벽을 차지하는 거대한 회화 작업을 볼 수 있다. 제목은 <장벽>으로 그 형태는 데이터의 입력을 기능하게 하는 ‘키보드’이다. 자판에는 모두 ‘물음표’가 그려져있다. 이 ‘물음표’라는 기호는 현대사회에서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수많은 의견과 가치에 대한 물음같다. 키보드 자판들은 눌려있기도 하고 가만히 있기도 하다. 또한 그 시점도 다양하다. 이것은 분산된 시선들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키보드와 <장벽>이라는 제목의 관계는 어떤가? 쉽게 유추되듯이 그것은 웹상의 익명성에서 기인하는 듯 하다. 따라서 키보드의 재현의 정도가 중요한게 아니고 이데올로기의 무한한 분산, 소통불가능성을 유추해내는게 중요하다.



설치 전경


<장벽>을 뒤로하면 작은 사이즈의 그림이 함께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작가에 의해서 중재된 이미지들을 보게된다. 이렇게 중재되는 이미지라는 특징은 전시장에 걸린 다른 작업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작은 사이즈의 모여있는 그림에서 그 특징은 뚜렷하게 강조된다. 이미지인 기표는 그 내러티브인 기의와 운명적으로 짝지어지지 않는다. 이미지는 작가가 원하는 기의에 들러붙는다. <장벽>과 마찬가지로 무엇을 재현했는지 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거듭 강조하지만 ‘왜 재현했는가?’가 중요한 단서다. 작업 중 하나인 <대리인>은 꼭두각시 핸들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착취’되는 노동자로서의 자신에게 연결된 실을 떠올린 것일까? <스스로 알아서> 작업은 빨강과 초록인 신호등 색의 이분법적 규칙과 달리 ‘자율적인 상황’을 뜻하는 ‘황색’을 두드러지게 그려냈다. 동시에 노동의 결과에 대한 책임이 노동자에게 전적으로 부과되는 상황과, 모두가 <스스로 알아서>해야하는 개인주의적인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대리인>, 종이에 먹, 호분, 60x50cm, 2015년



<스스로 알아서>, 종이에 먹, 주묵, 호분, 접시물감, 25.2x52cm, 2015년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고 신랄하다고 생각되는 작업은 바로 <벌레소리>이다. 이 작업은 태극기의 일부분을 재현한다. 애국심의 노골적 상표인 ‘국기’는 광복절이나 제헌절같은 국경일과 같은 날에 걸린다. 애국심이라는 것은 그 ‘심’자가 뜻하는 ‘마음’의 논리 보다는 그야말로 국기의 물질적인 펄럭임, 태극기의 전체적 이미지들에 귀속되어 버린다. 작가가 태극기보다 그것이 걸려있는 ‘봉’을 더 두드러지게 그린 것은 이런 어긋난 애국심의 이미지들을 잠시 비껴나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게다가 제목인 ‘벌레소리’가 한자로 쓰고 읽었을 때 ‘충성’이 된다는 것을 알게된다면 이 극단적이고 과도한 상표같은 애국이 여름에 시끄럽게 지나가는 한낱 벌레소리 처럼 퇴락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이렇게 중재된 이미지들은 작가가 생각하는 사회상의 이미지로서 한국사회의 내면적인 풍경화다.



<벌레 소리>, 종이에 먹, 호분, 접시물감, 32x51cm, 2015년


사회의 면면들에 대한 그림들을 지나 <낙서> 작업을 보면 그것이 곧 ‘작가 자신’의 모습을 반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려진 비석은 우리가 대기업이나 건물의 초입에서 볼만한 좋은 격언들을 떠올리게 한다. 언제나 훌륭한, 최상의 인간으로 향하라는 사회의 요구는 그 문구들로 구체화된다. 작가는 그 비석에다가 “관찰자가 될까봐 경계하고 프로파간다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나의 태도”라고 적는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폐허와 같은 풍경이 드리운다. 관찰자는 곧 방관자로 읽힌다. 단순한 미에 대한 열망에 빠지는 예술가가 될까 경계하고, 동시에 너무나 이데올로기에 범벅이 되버린 프로파간다가 되지 않기 위해서 고민하는 작가 자신의 ‘이도 저도 아닌 태도’는 오히려 긍정적인 방향으로 기능한다. 어느 쪽으로도 안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 경계에서 계속 미끄러지며 사회의 오류를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문구는 강력한 선언도, 주장도 아닌 ‘낙서’같은 끄적임이다. 이렇게 자신의 상황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바로 또 다른 문제를 발견하는 자세일 것이다.



<낙서>, 종이에 먹, 호분, 130x130cm, 2015년


도처에 산재한 것들은 작가에 의해서 화폭에 구현된다. 그 이미지는 상이해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기능하는 것은 사회의 오류에 대한 ‘망각’의 저항이다. 반복적으로 뭉그러지게 그림을 그리는 것도 이런 비망각을 위한 육화된 표현으로 보인다. 작가는 자기자신의 노동임무의 완전한 수행이 불가능함을 깨닫는 것 같다. 그리고 뚜렷하지 않지만 모호한 과정들을 실행한다. 한 개인과 사회의 초상들은 전체적인 거대한 시스템과 개인의 문제 모두를 포괄적으로 이야기한다. 정덕현 작가는 본인이 시스템 속 착취구조에서 존재함을 자각했기에 그 시스템 안에서 외부자로, 이방인으로 변질된다. 물론 그것은 구체적인 사물인 작품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자기자신의 구조적인 위치를 망각한 이는 언제나 시스템 안의 부속품이 된다. 작가의 그림은 톱니바퀴의 회전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흑백의 화면은 음울하고 무기력한 척 한다. 동시에 스스로의 변이를 숨기는 장치다. 작가는 ‘프로파간다’가 아닌 작업을 만든다. 정덕현 작가의 이미지는 순응적인 태도도 급직적인 거부의 자세도 보이지 않는다. 숨어있지만 어느 순간 따끔하게 자신과 관객 사회를 찌를 ‘송곳’같은 이미지다.


정덕현 작가의 작업을 화폭의 표면만을 가지고 의미를 해석하려 하는 것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다. 그 이미지에 숨은 송곳에 찔릴 때 좀 더 깊숙하게 접근할 수 있다. 이미지의 송곳에 찔리고 나서 구조 안에서 그대로 남을지 그것을 자각하고 좋은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인지는 개인의 선택이다. 사실 이미지의 무기력함은 극명하고, 저항성은 모호해서, 톱니바퀴 사이의 부산물을 치우듯 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덕현 작가의 그림에서 우리가 느끼는 또 하나의 길은 부산물을 구성원으로 만들도록 톱니바퀴의 구조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이한 근대화에서 부터 여전히 기이한 동시대까지 한국사회는 적절한 해체와 자기반성 없이 선진국으로의 욕망에 휘둘려왔다. 정덕현 작가의 이미지는 랑시에르가 그의 저서 ‘이미지의 운명’에서 말하는 “스스로를 폐기함으로써 실현되는 예술, 이미지의 간극을 없애 버리고, 예술의 절차들을 현행적인 모든 삶의 형태들에 일체화 시키고 예술을 더 이상 노동이나 정치와 분리시키지 않는 예술”이다. 그 이미지는 사회의 해체, 개인들의 해체를 통한 삶의 구조적 변화를 유도한다. ‘노동’이라는 출발점은 그 끝에서 결국 ‘삶’의 문제로 귀결된다.


 by. 하마


사진 출처 : 직접 촬영 및 네오룩, 합정지구 페이스북, 전시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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