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천 - 랠리 [Review]

2016. 2. 22. 16:31

김희천

랠리

Wall Rally Drill

커먼센터

2015. 12.17~2016.1.24


투명한 불투명성

Transparent opacity





찬 바람이 피부에 닿을 때 느끼는 마조히즘적인 감각은 무엇일까? 뜬금없는 이 질문은 폐허 같은 '커먼센터'에서 '김희천' 작가의 개인전 '랠리'를 관람하면서 첫 번째로 들었던 생각이다. 전시 공간은 궤도를 알 수 없는 길로 구획되어있고, 창문을 모두 뜯어내 안과 밖의 투명한 경계를 소거했다. 사라진 창문의 틈 사이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때문에 전시 관람은 불편하다. 이 불편함은 한 장소에 너무 빠져들지 않은 채 관람자가 전시장을 계속 떠돌게 한다. 감각에 대해 의문을 느끼며 찬 바람에 떠밀리다가 문득 창문이 있던 빈 허공을 바라보며 '투명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투명성 자체는 전시에 소개된 작업에서 큰 주제가 아니다. 은밀하게 나타난 투명성은 아마도 가상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그리고 왜곡될 수밖에 없는 이미지와 심상에 대해 고민하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글을 시작한다. 커먼센터의 입구로 들어서게 되면 바닥에 전시 배치도가 놓여있다. 커먼센터는 총 4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배치도를 통해 1층에 <랠리>라는 영상작업이 있고, 4층에 <$105-1> 사진 작업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공간 자체가 하나의 작업처럼 제시된 것이다. 배치도를 보면 따라가라는 듯 경로가 그려져 있지만, 흥미롭게도 작업이 없는 공간도 헛돌도록 표시되어있다. 다이달로스의 미궁처럼 전시장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것일까? 하지만 분명히 커먼센터라는 공간은 미로가 될 정도로 복잡하지는 않다. 우리는 미로를 구축하는 목적과 동시에 전시 전체를 살피기 위해 영상 작업 <랠리>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랠리 Wall Rally Drill>, HD, B/W, 33m, 2015 출처 : 김희천 작가 텀블러



<랠리>는 작가의 지난 작업 <바벨>과 <소울식/페깅/에어-트위킹>에 이은 3부작의 종착점이다. <바벨>과 <소울식/페깅/에어-트위킹>이 가상의 이미지를 중첩하거나 대두시켜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대한 냉소적 의문을 던지지만, <랠리>는 보다 직접 현실 속에 만연한 가상에 관해 이야기한다. 작업의 도입부에서 작가는 지난 작업에서 계속 언급되던 '루'라는 인물에게 더는 할 말이 없음을 메일로 보내며 죽어야겠다고 독백한다. 그러나 곧 '챗룰랫' 사이트를 통해 작가는 임의의 존재를 마주한다. 채팅으로 마주하는 뭇 남성들은 남근을 드러낸 채 화면에 점멸하듯 나타나지만 이내 다른 이로 바뀐다. 몇 번의 점멸 후 드디어 '막달레나'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이 인물을 통해 작업 속 화자의 '랠리'가 시작된다. '막달레나'는 죽음에 관련된 마음수련의 방법을 화자에게 설명한다. 도입부에서 화자가 '죽어야겠다'라고 말한 것이 문득 생각난다. 이때부터 '막달레나'가 정말 타자인지, 화자를 반영하는 또 다른 인물은 아닌지 의심되기 시작한다. 어쨌든 '막달레나'는 현실이 허상 세계의 데이터로 가득한 곳이기 때문에 자아를 소멸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컴퓨터 하드디스크의 데이터를 삭제하는 행위로 비유된 수련은 화자와 관람자의 세계에 대한 인식 축이 전환되도록 유도한다. 화자에게 길을 제시하는 '막달레나'는 버퍼링에 걸려 버벅대기도 한다. 이 버퍼링이 오히려 작업에 시선을 머물게 하는 '틈'으로 보인다. '막달레나'는 화자가 보는 채팅 영상 뒤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은 '막달레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니터, 스크린 그리고 앞으로 이야기할 유리 파사드의 공허한 환영에 대한 경고로 보인다.



<랠리 Wall Rally Drill>, HD, B/W, 33m, 2015 출처 : 김희천 작가 텀블러


작업 속 화자는 '막달레나'의 말에 따라 허상 세계에서 자아를 소멸하기 위해 밖으로 향한다. 초여름의 거리 풍경은 채팅 영상을 보여 줄때와 다를 법도 하지만 흑백의 채도에 의해 영상과 실제 풍경의 차이는 영도가 된다. 화자는 관람자가 전시장을 공회전했던 것처럼 도심 속을 부유하는 랠리를 통해 '유리'의 존재를 대두시킨다. 작가는 '유리'라는 경계를 버스나 건물 안에서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효과적으로 폭로한다. 투명한 유리는 오히려 밖과 안의 이미지를 모호하게 만든다. 어떤 장면에선 자동차와 사람이 겹치는 순간이 나타나기도 한다. 치이려는 순간 유리 속 풍경은 중첩돼 소멸하고 만다. 영상 속 투명한 유리의 경계는 불규칙하게 투과하고 반사해 결국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만든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이자 유리 덩어리인 '롯데타워'는 화자를 통해 '가장 밝은 태양'으로 명명된다. 우주가 평면이고, 3차원이 홀로그램이라는 음모론 속에서 '롯데 타워'는 홀로그램을 소환하는 중심축이다. 작업을 통해 화자와 관람자는 '당신은 어디 있는 것인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이 당신을 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마주하게 된다. 화자는 질문을 해소하기 위해 가장 밝은 태양을 오르며 '막달레나'의 말에 투정한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마천루로 올라가는 장면이 '유리'를 통해 반사된다.



<랠리 Wall Rally Drill>, HD, B/W, 33m, 2015 출처 : 필자촬영



<랠리 Wall Rally Drill>, HD, B/W, 33m, 2015 출처 : 김희천 작가 텀블러



<랠리 Wall Rally Drill>, HD, B/W, 33m, 2015 출처 : 김희천 작가 텀블러


건물의 유리는 모든 것을 반사하면서 이미지로 만든다. 투명하게 보이는 밖의 풍경을 진짜 이미지가 아니라 '유리'라는 경계를 통해 왜곡된 것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을 인지하기 위해 타자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투명하다는 환영을 가지고 반사되고 왜곡되는 '유리'의 사회에서는 타자를 볼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명백한 타자를 보고 있지만 그것이 실제인지 구별할 판단능력을 소실했다. 화자가 롯데 타워에 오르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랠리> 작업의 세 가지 질문 속 답이 아닌 함의를 알 수 있다. 위치와 보기에 대해 영상 속 화자는 시선을 찾기 위해 즉, '막달레나'가 ‘허상 세계'라고 말하던 현실 속에서 다시 자기 위치를 각인하기 위해 '롯데타워'를 오르는 것이다. 이때 화자는 '사우론'의 눈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애석하게도 롯데타워에 오른다 해서 변하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화자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모두 '유리파사드'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사우론의 눈처럼 강력한 시선의 주체가 되고 싶던 작가는 자신조차도 유리와 같다는 결말에 다다른다. 결국, 투명한 건물이나 투명한 삶이나 아무것도 볼 수 없기는 매한가지이다. 화자는 이제 차라리 집으로 가고 싶다거나 '막달레나'가 먹지 말라던 튀긴 빵을 먹고 싶다고 한다. 이때 집으로 가는 행위는 로그아웃으로 비유되며, 현실과 가상의 구분은 모호하다.



롯데 타워의 야경



'반지의 제왕'에서 사우론이 존재하는 '바랏두르'



사우론의 거대한 눈


화자는 작업을 진행하며 유리 안쪽에 있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막달레나'가 모니터 안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던 것과 달리 '롯데타워'와 유리창 안에는 공사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이때 우리의 현실이 가상과 혼동되지만, 여전히 밀도 높게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유리로 뒤덮인 건물의 내부는 보이지 않지만, 건물 안에서 밖의 풍경은 잘 보인다. 이런 상황을 화자는 태극기가 걸린 외부와 내부를 교차함으로써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작업 안에서 투명성은 내가 밖을 바라볼 때만 최소한으로 나타나며, 외부에서 내부를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해져 버렸다. 유리 건물과 화자-관람자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지치지 않는 ‘랠리’(1)를 하고 있다. 첫 번째로 통과되지 않는 시선을 ‘나’와 타자가 무한히 맞받아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내’가 자기 위치를 가늠하기 위해 도시를 부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치에 연관된 두 번째 랠리는 시선과 관련된 첫 번째 랠리의 무력함 때문에 무마된다. 화자는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오다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전시장인 ‘커먼센터’로 오게 된다. 옥상에서 열리는 파티의 장면들이 나오고, ‘화자’이자 ‘작가’의 실제 동료들과 함께 춤을 추고, 비틀대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작가는 본인을 감추고 있었지만, 영상의 끝에서 점차 드러난다. 챗룰랫을 다시 켠 작가는 ‘풍경’이 되어버렸고, 아버지와 만나게 되었다. 작업이 종료될 때 작가는 스스로 인사하고 '엿'을 날린다.



<랠리 Wall Rally Drill>, HD, B/W, 33m, 2015 출처 : 필자촬영



<랠리 Wall Rally Drill>, HD, B/W, 33m, 2015 출처 : 필자촬영



<랠리 Wall Rally Drill>, HD, B/W, 33m, 2015 출처 : 김희천 작가 텀블러


로그아웃이라는 본인의 목적이 달성되고 끝난 작업과 전시의 틀에서 벗어나 잠시 ‘투명성’에 대해 재고해보려 한다. ‘투명성’에 대한 사유를 위해 ‘할 포스터’의 [콤플렉스]와 ‘한병철’의 [투명사회]를 검토하면 좋을 것이다. 우선 <랠리>에 나오는 ‘유리 덩어리’ 혹은 ‘할 포스터’가 [콤플렉스]에서 ‘수정궁’이라고 부르는 ‘글래스 커튼월’과 같은 건축양식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할 포스터’는 하나의 글로벌 양식으로서 유리 덩어리 건축물을 소개하면서 건축가 ‘노먼 포스터’에 시선을 집중한다. 유리를 이용한 건축물은 철재를 올리고, 유리를 붙이는 과정으로 지어지는데, 이는 효율적이고 빠르게 더 넓은 공간을 구성하는데 쉽다고한다. 이 건축물들은 기술적 합리주의와 자본주의 아래의 낙관적 시선이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할 포스터’는 ‘노먼 포스터’의 작품이 “대부분 기업이나 정부가 갖고 싶어 하는 ‘세련된 효율성’(2)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풍긴다”고 말한다. 뒤이어 “전형적인 포스터 디자인에서 사용되는 엄청난 양의 유리가 클라이언트의 정치적, 행정적 투명성을 암시한다는 점은 무엇보다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3)고 서술한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보이는 효과에 대해 그는 “이런 것들은 상당히 불투명할 수도 있는 것들이다.”(4)라고 경고한다. 더 나아가 “건축가나 대표자의 눈에는 탁 트인 사무공간이 위계를 없앤 민주적인 공간으로 보일 수 있지만 피고용인에게는 죄수를 한눈에 감시하는 파놉티콘처럼 억압적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처음에 투명하게 보였던 것이 극적인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빛과 유리도 관심거리 이상의 가치, 즉 책임 있는 시정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지 못한다”(5)고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는 ‘할 포스터’가 ‘세련된 효율성’과 ‘행정적 투명성’이 ‘투명한 파놉티콘’과 ‘극적인 구경거리’로 전락할 수 있는 아이러니를 말하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물질적으로 표상된 투명한 행정과 시정은 스펙터클에 의해 파놉티콘이라는 형태로 변이된다.


‘김희천’ 작가가 ‘유리 파사드’로 전락한 인간 모습을 보여줄 때 우리는 철학자 ‘한병철’이 저서 [투명사회]에서 “투명성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유리 인간을 만들어”(6)낸다고 주장하는 것을 상기할 수 있다. 투명성이 만든 유리 인간의 사회에서 어떻게 ‘베일’이 모조리 벗겨지고, 세계가 ‘전시가치’의 온상으로, 즉 스펙터클의 온상으로 환원되는지 ‘한병철’은 고찰한다. 이렇게 보이고, 보여지는 사회에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디지털 파놉티콘을 형성한다. ‘한병철’에게 투명한 사회는 일차적으로 ‘긍정사회’로 출현했다. 이 긍정성은 유리 건축물에서도 알 수 있듯, 청렴함의 물신화 같은 표피적인 것에 불과하다. 부정성은 모두 사라지고, 건축양식의 일원화처럼 불투명한 것은 배척된다. 그래서 ‘한병철’은 “투명성은 타자와 이질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가속화한다. 이러한 시스템의 강제로 투명사회는 곧 획일적 사회가 된다. 바로 이 점에 투명사회의 전체주의적 특성이 있다.”(7)라고 확언한다. 그에게는 “타자가 투명하지 않다는 사실 자체가 관계를 살아있게”(8)하지만, 모든 게 보이는 관계에서는 자기를 더 감출뿐이다. 긍정사회의 측면으로 투명성에 대해 고민을 시작한 ‘한병철’은 뒤이어 ‘전시사회’의 모습에 관해 기술한다. 전시가치로 버무려진 사회에서 모든 것은 ‘보여주기’ 위해 힘쓴다. 그는 “사물들이 상품화되어 전시되지 않으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취급되는 긍정사회에서 사물들의 제의가치는 전시가치에 밀려 사라지고 만다.”(9)고 이야기한다. 사물이든, 건축이든, 인간이든 우리는 ‘가시화'되지 않으면 그것의 내재적 가치도 알 수 없다고 쉽게 생각한다. ‘가시화’된 것은 곧 상품이라는 가치를 가지고 나타나기 마련이다.


폭력적으로 모든 것을 이미지화하는 ‘투명성’은 포르노처럼 납작하고 직접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서로를 납작한 포르노 이미지로 소비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양식의 비원근법적 파놉티콘”(10)이 나타난다. 자유를 전제로 하는 이 투명한 파놉티콘은 과도한 커뮤니케이션, 노출증, 관음증에 의해 자라난다. 우리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나, 마주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해 ‘객관적’으로 정리된 ‘투명한’ 정보를 너무나 많이 소유할 수 있다. 동시에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개인들에 대해서는 그가 하는 행동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객관적 정보(팩트)에 기준을 맞추면 결국 ‘주체’는 ‘객체’를 신뢰할 수 없다. 신뢰는 불투명한 믿음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투명화하는 세상에서 신뢰란 역설적인 것이다. 투명한 것은 불투명함을 은폐하고 교환되는 것(시선, 언어 등)을 차단하며, 불투명한 신뢰는 서로에게 오히려 투명한 관계를 부여한다.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서로를 이해하리라 기대되는 사회에 불신이 팽배하는 작금의 미친 역설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은 ‘김희천’ 작가가 <랠리>에서 직접적이며 은유적으로 인간이 ‘유리 파사드’와 다를 바 없음을 지적할 때 나타난다. 이렇게 소통 불가한 지점에서 우리는 ‘나’도 더는 믿을 수 없게 되지 않을까? 왜냐면 ‘나’는 그 어떤 객관적 데이터로도 환원해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것은 결국 나의 왜곡된 시선과 반사된 시선이 겹친 상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되받아치는 자신에게 뒤덮인 유리를 깨어내야하지 않을까?


‘할 포스터’와 ‘한병철’을 거쳐 우리는 다시 ‘김희천’ 작가 혹은 <랠리> 속 화자에게 돌아간다. 풍경이 되어버린 화자의 모습은 외부를 반사할 수밖에 없는 유리 파사드로 보인다. 작업의 목적을 피상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의문이라고 말하는 작가는 투명성 넘어 진짜 소통을 바라는 것은 아닐까? 단순히 작업을 병렬하고 마치는 개인전과 달리 이 전시는 공간을 통해 <랠리> 작업을 다시 재현한다. 따라서 정신없지만, 서사적으로 단계를 밟아가며 목적을 달성한 영상작업을 두고 관람자들은 다시 전시장으로 재 호명된다. 관람자들은 전시장에서 서울풍경을 실제로 마주 해야 한다. 4층의 사진 작업을 보기 위해 다시 올라가 보는 길은 처음 들어섰을 때와 다르다. 미로와 같은 배치도와 공허한 창가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우리에게 덮인 그리고 스스로 뒤덮은 ‘유리’는 전시공간에서 삭제됐다. 그러나 창문 없이 통과된 시선에 여전히 존재하는 유리 덩어리는 영상 속 화자처럼 관람자의 위치를 모호하게 한다. 그러나 그 공허의 공간에서 불어와 살에 닿는 찬 바람이 ‘투명한 불투명성’에 가려졌던 좌표를 뛰어넘어 ‘나’라는 존재를 자각 하게 만든다. 우리는 현실보다 거대한 가상을 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육체는 찬 바람이 닿는 현실에 위치한다. 사회 속 위치를 통한 자기인식만이 팽배한 지금 육체와 감각을 통한 인식은 상대적으로 부족해지고 있다. 전시장을 나가면 다시 우리는 투명한 사회로 내던져지지만, 적어도 폐허같은 그곳에서는 육화된 ‘나’를 인식할 수 있었다.


by. 하마


각주


1. 랠리의 사전적 의미는 아래와 같다. 

명사 <운동>

  1. 탁구ㆍ테니스ㆍ배드민턴ㆍ배구 따위에서, 양편의 타구가 계속 이어지는 일.
  2. 자동차 경주의 하나. 일반 도로의 정해진 구간을 규정된 시간과 속도로 달려서 실점의 차이로 우열을 가린다. 주로 장거리 구간에서 밤낮의 구별 없이 행한다.
  3. 권투에서, 서로 계속 때리는 일.


이 글에서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는데, 첫 번째는 사전적 정의 1과 3처럼 서로 맞받아친다는 의미이며, 두 번째는 사전적 정의 2처럼 어떤 구간(본 글에서는 도시)을 달리는 것이다. 두 번째 의미가 다소 모호할 수 있으나 자동차 경주란 결국 위치를 더 빨리 옮기는데 중시한다는 점에서 착안했다.


2. 할 포스터, [콤플렉스], 김정혜 역, 현실문화, 2014,  77~78p

3. ibid, 78p

4. ibid, 78p

5. ibid, 91p

6. 한병철, [투명사회], 김태환 역, 문학과 지성사, 7p

7. ibid, 15p

8, ibid, 17p

9. ibid, 29p

10. ibid, 9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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