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원

슬픈 몸

플레이스막

2016_02.12 - 02. 28

팔루스적 시선에 걸린 여체

 


 

 

넓지 않은 홍대 ‘플레이스막’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다소 진부할 수 있는 회화작업이 전시장에 걸려있다. 대부분의 작업에는 여성이 중점적으로 그려져있다. 작가의 이름은 '박정원'이었다. 작업을 심드렁하게 보던 중 내 눈에 들어오는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스타킹’이었다. 물론 실제 스타킹이 아니라 작가가 묘사한 회화표면 속 형상이었다. 그것은 극사실기법, 사진, 실제 스타킹보다 더 스타킹같았다. 작가는 작업 속에서 스타킹의 늘어남, 뚫렸지만 막힌 듯한 은밀한 노출의 묘사를 통해 의복기능과 전혀 상관없는 스타킹의 패티쉬를 드러내는데, 바로 이것이 스타킹이 사실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박정원'작가의 작업 속의 패티쉬는 본래의 개인적인 물신숭배와 달리, 매체를 통해 대다수가 공유한 방식을 보도록 한다. 스타킹은 본래 남성 기사가 갑옷을 입을때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입는 내의로, 레깅스의 형태에 가까웠다. 그러나 현재의 스타킹은 여성의 성적 매력을 위해 이미지화 되었다. 스타킹의 화면 속 묘사를 통해 나는 ‘슬픈 몸' 전시에서 박정원 작가의 작업이 보여주는 ‘여성’에 부과된 편견적 시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글은 그 시선을 재고해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박정원_<밤과 춤>_캔버스에 유채_116×73.5cm_2015

 

전시장에서 ‘사교춤’을 추는 모습의 인물과 '탈의실'에서 행동하는 인물이 그려진 회화작업을 마주할 수 있다. 어쩌면 사교춤 동호회에서 춤을 추기 전에 옷을 갈아입고, 꾸민다는 가상의 시나리오가 떠오른다. 그러나 각 이미지의 공간들은 서로 아무 연관없게끔 특징지어졌고, 구획되어있어 우리는 인물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 밖에 없다. <어려운 스텝>이라는 작품에는 여성의 청바지를 워싱처리된듯 잘 표현해낸다. 작가는 스타킹, 청바지와 같이 대상의 표피적 느낌을 잘 살려낸다. 그런데! 어딘가 인물의 신체가 어색하게 보인다. 그녀의 둔부는 너무 비대해보이고, 춤을 추지만 딱딱하기 그지없다. 그녀는 아무 이상이 없어보이는 남성 옆에 있다. 모든 인물이 매력적으로 그려져있지 않지만, 우리가 거기서 보는 것은 여성의 타락한 몸이다. 그림 속 여성은 파인 옷, 하이 힐, 커다란 엉덩이, 짧은 옷, 스타킹과 같은 여성의 '성적매력'을 상징하는 것을 입고있다. 그러나 음울한 채도, 긁혀진듯한 회화표면, 갑갑한 배경은 원래 매력적으로 구성되었어야만하는 그 신체를 무너뜨린다. 똑같이 매력이 탈색된 이미지에서 여성만이 대상으로 남는다. 이는 <밤과 춤>을 통해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춤을 추며, 입맞춤인지 아닌지 모를 자세를 취한 남녀는 무표정을 짓고있다. <어려운 스텝>의 남성과 <밤과 춤>의 남성은 전혀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느껴진다. 화면 밖에서 그리고 안에서 남성은 언제나 여성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동일한 ‘남성’, 즉 팔루스적인 자아를 가진 이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시선아래 여성은 ‘매력’을 느끼게 할 부분을 가져야한다. 사교춤을 추는 사람을 묘사한 이 두 작업에서 우리는 ‘매력’에 대한 편견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 수 있다. 남성 옆에서 여성은 잘 꾸미고, 그가 좋은 여성을 소유할 능력이 있음을 확인하게한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현실 도처에서 여성과 남성의 전통적 구분의 그름이 밝혀지고 있지만, 아직도 편견의 시선은 팽배하다.

 

 

박정원_<어려운 스텝>_캔버스에 유채_116.8×53cm_2016

 

탈의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작업은 바로 <여자, 여자, 여자>이다. 세개의 시리즈가 연이어 디스플레이 되어있었다. 세 장면 모두 마치 같은 공간에서 있는 사람들을 비추는 듯 하다. 그러나 역시 답답한 배경처리는 이내 의구심만을 증폭시킨다. 작업 속에 나타나는 여성들은 각자 어떤 행동(렌즈를 끼거나, 머리를 말리고, 빗고, 옷을 벗고, 팩을 하고, 속옷을 입는.)을 하고 있다. 여성들은 사회에서와 달리 매력적이거나 단아한 대상화된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저 마다의 도취된 행동을 보여준다. 여성은 남성의 권력에 종속되게 행동한다는 관념을 거부하는듯 나르시시즘적으로 보일법한 도상들이 그려져있다. 화면속에 그려진 여성들 중 팩 하는 여성은 화면 밖의 관람자를 의식하는 듯 쳐다보고있다. 그러나 그들이 화면 밖을 의식하는 것으로 볼 수 없는것은 바로 렌즈를 끼고 있는 여성때문이다. 그녀는 팩하는 여성과 달리 방향을 달리해 스스로를 보고있다. 물론 <여자, 여자, 여자> 그림은 세 작품으로 나뉘어있으며 팩한 여성과 렌즈끼는 여성은 다른 작품에 그러져있다. 하지만 함께 디스플레이된 화면은 마치 하나의 큰 거울이 존재하고, 나는 그 뒤에서 거울 안쪽을 바라보는 느낌을 준다. 이 작업을 보는 우리의 시선은 그야말로 관음에 다름없다. 그려진 대상은 나를 인식하지 못하며, 나는 그 세계에 속할 수 없다. 그러나 전통적인 도상에서 나타나는 여성을 소유하는 남성도 없으며, 관람자와 시선을 맞추는 환상의 연인으로서의 여성도 사라진다. 관객을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은 다른 여성의 시선에 의해 붕괴된다. '박정원'작가의 여체묘사는 완전한 누드를 보여주지 않는다. 작업속에 그려진 여성들은 경계의 상태로 '누드'가 아닌 '네이키드'로 볼 수 있다. 그녀들은 스스로 벗는다.

 

<여자, 여자, 여자> 설치 전경 - 직접 촬영

 

이제 작업이 화면 밖과 관계할때 붕괴된 '시선'에 대해서 면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대상을 보는 ‘시선’을 구성하는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대상에서 반사된 빛을 통해 그것을 식별한다. 하지만 인간의 눈은 카메라와 달라 대상이 지속되거나 사라지는 순간들을 명확하게 알 수 없고, 단지 느낄뿐이다. 눈은 제멋대로 인식된 대상을 규정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편견’은 사회, 문화적으로 형성된 콘크리트같은 개념으로 이는 ‘시선’에 의해 구체화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예는 바로 여성에 대한 ‘시선’이다. 수많은 시선이 존재하지만 그 중 다수를 차지하며, 자본주의 아래에서 ‘성상품’으로 쉽게 가공되는것은 대개 젋은(육체가 젊은) 여성이다. 여성에 대한 상품화는 물신화로 이어져 그녀를 ‘스타'로 만든다. 스타에 의해 다수 남성의 성욕은 쉽게 통제될 수 있는것으로 보인다. ‘아름다움’이라는 규정될 수 없는 그 가치는 스타로 대변되는 물신의 기준에 맞춰지고, 모든 여성으로 점차 퍼진다. 남성에게는 이 ‘시선’이 좀 처럼 가지 않는다. ‘팔루스적 시선’은 일순간에 여성을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꾼다.상품으로 치환된 여성의 인격은 소멸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 모호하고, 폭력적인 시선을 해결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팔루스적 시선은 여성에 대해 양파껍질같은 다중은폐를 적용해왔다. 여성성이란 숙녀로 대표되며 창녀와 노동여성의 '성'은 타락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숙녀는 그렇지 못한 여성들을 팔루스적 시선으로 똑같이 본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세상에서 사는 여성을 보고 충격을 받으며, 자신의 몸가짐을 더 신경쓴다. 과거의 일로만 생각되는 이런 시선은 여전히 잔재해있다. 조금씩 제약이 사라졌지만, 여성은 시선에 위치하기위해 계속 조건을 채워갔다. 페미니즘으로 인해 남성적 시선이 공격받으면서 직접적인 시선은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아직도 남성적 시선은 우리가 매일 보는 이미지들에 숨어있다. 드라마의 여성에 대한 관념은 똑같이 남성에게 적용했을때 얼마나 폭력적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남성들에게는 항상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각기 다르지만 궁극적으로는 팔루스적 자아로 귀결된다.

 

 

박정원_<여자 여자 여자2>_캔버스에 유채_130×60cm_2015

 

이 글은 한 전시의 한 작가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여성에게 부여된 남성적 시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단순히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지않고 시선에 대해 서술하는것은 '박정원'작가의 여성 묘사가 그만큼 우리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시선을 이야기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언어에 대해 생각해야한다. 시선과 시각문화는 순간의 인상들을 결정하며, 매 순간 인간들이 자기 주변을 인식하는 방법에 관련된다. 그에 반해 언어란 그렇게 인식되고 구체적으로 생각되는 '사실'을 추상화한다. 언어와 시선은 순환하며 서로에게 작동한다. 사실 시각(본다는 것)이 언어보다 먼저라는 것은 알기쉽다. 하지만 단순한 시각과 달리 우리의 문화와 사회를 규정하고,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편견을 만드는 시선은 언어에 따라서 나타난다. 언어는 무엇보다 가장 인공적인 것으로서 역사를 서술하게 하고, 사회와 문화같은 개념을 만들게 한다. 어떤 생각은 어떤 시선에 영향을 미친다. 그 시선은 어떤 언어로 표현된다. 단순한 언어가 권력과 뒤섞여 지배적인 언어로 되었을때 그것은 시선을 결정한다.

 

 

박정원_<여자 여자 여자1>_캔버스에 유채_130×60cm_2015

 

인간은 육체라는 빈약함을 언어라는 기계를 통해 보충한다. 또한 물리적 힘을 통한 약탈, 여성 종속, 노예화를 좀 더 편하게 이루어낼 방법은 바로 언어를 이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에는 언제나 누군가에 대한 편견을 구성하는 위험이 도사리고있다. 언어로 구체화되고, 반복되 사용된 개념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구체적 사실인양 자리잡는다. 우리는 관습적으로 내려온 말씀에 귀속된다. 이 말씀들은 권력적인 언어로 역시 우리의 시선을 결정한다. 생각->시선->언어->시선의 고리에서 생각은 어느순간 은폐되는데, 관습, 편견, 금기는 그것의 오류를 생각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이 글의 근본적 질문인 여성에 대한 편견으로 되돌아오자. 여성에 대한 시선, 언어, 사고들은 생물학적이고, 본질적인 측면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언어의 인공성만큼 쓰여지는 말들-여자의 적은 여자, 여자는 질투가 많다, 히스테리-은 개별자의 행동을 전체여성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체여성에 부과된 이미지는 각 여성을 학습시키고, 심지어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여성성을 구속하는 행동들이 다시 남성에게 향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때 어떤 남성들은 팔루스적 시선을 버리기보다 '여성혐오'를 통해 오류를 은폐한다.

 

 

박정원_<여자 여자 여자3>_캔버스에 유채_130×60cm_2015

 

작가는 전시제목 '슬픈 몸'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의 신체가 감내해야하는 슬픔을 짚어내고자 한다. 얼핏보면 작가가 패티쉬즘을 묘사해서 여성을 대상화시키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 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전시의 작업들은 대상화된 이미지를 숨기지 않고 폭로할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하여 자기 자신을 고발한다. 이렇게 대상화된 여성의 신체를 이미지화해서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전략은 진부하기도 하다. 그러나 박정원 작가는 갑갑한 배경 묘사와 무거운 색 표현, 매력적이지 않은 여성묘사, 스타킹의 패티쉬적 재현방법 등을 사용해 진부함에서 빠져나온다. 작가가 재현하는 여성들은 <사교춤 시리즈>에서는 문화적 시선에 내던져진 여성의 신체를 보여주며, <여자,여자,여자> 작업에서는 그 시선에서 벗어난 여성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렇게 묘사된 여성은 여전히 그 시선 속에서 재현된다. 여성의 자유로운 신체는 예로부터 타락의 상징이었다. 작업에서 여성의 신체는 매력적이지 않게 재현되지만 그로인해 진짜 '몸'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몸을 그려냄으로써 여성 신체에 부과되는 무거운 시선을 벗겨내려한다. 따라서 우리는 몸을 보지만 동시에 나의 시선, 그리고 주변의 시선을 보게되는것이다. 이 시선은 하루아침에 말소시킬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작업을 보고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낄지라도 우리의 시선 깊은 곳에 숨은 '편견'을 내려놓기는 여간 어려운게 아닐 수 없다. 대중매체에서, 우리주변에서 만연하게 복귀하는 그 시선과 싸워야한다. 한 작가의 조그만 개인전에서 너무 커다란 이야기를 하는게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겐 이런 이미지가 너무 소중하다. 망막에 도사린 그 시선을 거세할 수 있는 이미지는 쉽게 볼 수 없다. 여성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든 편견에 맞서 싸워야할것이다. 그 편견은 언젠가 내 등을 찌를 수 있기 때문이다.

 

by. 하마

사진 출처 : 네오룩(https://neolook.com/archives/20160212f)

 

 

 

 

BELATED ARTICLES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