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 갤러리

강정석 - GAME 1

2016.11.23-12.24






전시전경 / 출처 : 두산 갤러리



전시전경 / 출처 : 두산 갤러리


Auto-play


시간의 한계로 쓰이는 이 글은 무언가 ‘제약’을 걸고 제작되던 ‘게임’에 가깝지 않을까 기대한다. 글을 쓰는 ‘나’는 사회와 격리된 신분을 가지고 있다. 결국 ‘나’는 내가 3달 전까지만 해도 현실적으로 살아온 장소를 비현실적 매개체를 통해 접속할 수 밖에 없다. 이때 ‘사회’라는 비균등하고 추상적인 시스템이자 장소는 국가가 되기도 하고 내 집, 인간관계로 나타나기도 한다. 중요한 건 내가 이 사회들을 체감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앞에서 말했듯이 ‘게임’에 접속하는 것과 같다. 위병소를 통과해 플레이어가 된다는 것은 생경한 경험이다. 내게 바깥(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은 일종의 가상과 같은 것이고, 시간제한을 가진 루트와 같았다. 그렇게 ‘게임’에 접속하듯 살아가고 있는 나는 첫 번째 접속에서 작가 강정석의 ‘Game 1’을 플레이했다. 내 신체는 육화된 몸을 가지고 피로를 줄이기 위해 잠을 호출했지만 ‘Game 1'은 그 잠을 비집고 들어와 내게 생각을 유도했다. 솔직히 고백하면 단절된 시간 만큼 내게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게 아닐까 두려워졌다. 특히나 ‘미술’에 대해 생각하는 버릇이 사라질까 두려웠다. 그러나 ‘Game 1'은 나에게 손을 사용해 무언가 적도록 했다. 어쩌면 내게 'Game 1'을 플레이하는 경험은 글을 씀으로써 마무리되는 게 아닐까?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생각들을 갈무리하며 글의 서두를 마무리 짓는다.



<GAME I>, 2016, 

플레이스테이션2 전용 게임 케이스, 플레이스테이션2 8MB 메모리 카드, 사진, 퍼머넌트 마커, CD

130x190mm 

출처 : 두산 갤러리


허망하리만치 공허했던 전시장은 영상작업 하나와 <무제(K.va의 가을)>이라는 작업만을 표기한다. 그리고 작업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호한 설치된 사물들이 나열되어있다. 이 모든 풍경은 전시의 끝이 아니다. 작가는 전시를 위해 공략집과 매거진이라는 텍스트를 갖춘다. 자기 작업을 정당화하는 요소가 아닌 그 자체로 하나의 작업이 되는 모든 요소가 여기에 있다. 어쩌면 ‘게임’이 그 본질에서 이미지와 사운드와 프로그램과 하드웨어같이 여러 요소의 결합으로 작동하는 복합 기호체임을 상기한다면 전시에 소개되는 모든 것들은 수평적인 관계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Play or Play



<무제(K.Va의 가을)>, 2016, 유포지에 프린트, 계절 공예품, 

플레이스테이션2 8MB 메모리 카드, 사진 및 CD가 포함된 플레이스테이션2 전용 게임 케이스

가변 크기

출처 : 두산 갤러리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영상작업에 눈을 맞추게 된다. 알 수 없는 이미지와 텍스트들이 공회전한다. 흑백의 영상과 그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오는 트와이스 혹은 프로게이머... 이는 작가 강정석이 선정한 [BEGELINA]라는 인공지능에 의해 제작된 것(이라고 우리는 속을 필요가 있다)이다. 이 인공지능은 ‘유저의 메타데이터’를 일정 기간 제공받아 게임을 제작한다. 강정석의 메타데이터로 제작된 <GAME1>은 작가의 사적기억과 2016년의 흔적이 버무려져있다. 이 전시의 <GAME I: Speedrun Any% PB>이라는 작업은 게임이 어떻게 소비되는지 보여준다. 이 <Game 1>작업은 우리가 흔히 플레이하는 의미의 게임이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흘러가는 방식으로만 진행이 되고 ‘플레이 영상’의 형식을 그대로 가져왔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에도 게임은 플레이어의 동작에 반응해서 세계를 탐험하거나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방식을 취한다. 하지만 현재의 게임들은 타자의 플레이를 발판삼아 대리 경험을 하는 경향으로 발달하기도 한다. 이는 가상세계에서 육화된 아바타를 움직이는 게 아니라 동작하는 아바타에 탑승하는 것이 된다. 자동으로 움직이는 모바일 게임의 형태들을 보면 아주 간단히 게임을 수행하게 된 것 같다. 실제로 플레이어는 끄고 켜는 관리자가 된다. 컴퓨터의 오토 플레이는 플레이 영상처럼 흘러가며 마치 멈추고 다시 시작하듯 스킬을 사용하는 버튼만 반짝인다. <GAME1>은 자칫 이런 게임들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Game 1>은 흔한 동영상처럼 보이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업는 그런 ‘게임’이다.


작품의 구성상 공략집에 나온 것처럼 게임은 총 4장으로 구성된다. 각 장에는 텍스트가 있는데 이를 전자 보이스가 읊어준다. 작업을 보면서 게임은 진행되는데 이를 보지 못하게 자꾸만 음성에 맞춰진 혹은 상관없는 기호들이 튀어나와 방해한다. 게임이 투사되는 방법적 측면을 통해 작가는 게임의 본질을 소개하는 것일까? 게임이 복합적인 요소들의 결합임을 우리는 서론에서 이야기했다. <Game 1>작업에 포함된 여러 요소는 게임을 게임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때 게임장면은 흑백으로 보인다. 원래 게임이 흑백일까? 아니라면 필터를 적용한 것인가? 알 수 없는 건 이 게임이 실제 제작된 게임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물론 <Game 1>에 포함되어 재생되는 게임은 실제로 출시된 기성게임들이다. 기성게임을 알아볼 때 묘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것은 플레이될 수 없기에 ‘불능감’을 유발한다. 작가는 게임에서 가지고 갈 수밖에 없는 한계인 ‘불능감’을 잘 알고 있다. 이 ‘불능감’이 오히려 “가상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욕망을 자극하고 문제를 해결하려해왔다고 한다. 기술이 끊임없이 갱신되는 ‘게임 개발’에서 ‘불능감’은 점점 ‘가능하다’라는 동사로 바뀐다. 그러나 이때 게임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매체들도 변화했고, 게임을 현실에 매개하는 방식이 변이한다. 게임은 실제 플레이하는 ‘인터랙션’한 경험이외에도 공략집이나 잡지를 통해 상상하며 플레이까지의 ‘불능감’을 완화시켜주는 장치를 가지게 된다. 여기서 ‘플레이 영상’은 불능감 자체를 포기한다. 타인이 클리어하는 장면을 본다는 것 그 자체가 동물적인 감각을 자극한다. 상호작용플레이는 말초적 버튼 누르기로 전락한다.



<GAME I: Speedrun Any% PB>, 2016, HD, 27min (스틸컷) / 출처 : 두산 갤러리




<GAME I: Speedrun Any% PB>, 2016, HD, 27min (스틸컷) / 출처 : 두산 갤러리


이 전시에서 작가가 게임의 현상 자체를 비관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작가가 찾고자 하는 건 바로 현실이 그렇게 ‘관성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이는 게임의 향유태도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전시의 작업이 이를 폭로하거나 적극적으로 발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동으로 매칭되는 현재의 인터넷 세계의 형태를 보면서 그리고 <Game 1>에서 보이스가 떠드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를 알 수 있다. 자연스레 여기서 촉발되는 문제는 게임을 하는 그 특유의 단절된 순간을 이제는 찾기힘들다는 것이다. 가상으로 빠지는 하나의 특권화된 시간이 사라졌다. 이때 강정석의 <Game 1>은 과거와는 달라진 게임소비의 형태를 껍질로 쓰지만, 전시장이라는 외부와 단절된 시, 공간에 ‘게임’을 펼침으로써 특권화된 가상을 다시 보여준다. 이 리뷰가 작업에 대해서 떠들지 않는 건 나의 식견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더 중요한 것은 ‘게임’을 구성하는 알고리즘을 미술이라는 체계에 맞춰 재배열하는 작가의 감각이다.



<GAME I: Speedrun Any% PB>, 2016, HD, 27min (필자 직접 촬영)




<GAME I: Speedrun Any% PB>, 2016, HD, 27min (필자 직접 촬영)


전시장에서 끊임없이 의문을 품었던 것은 ‘나는 정말 <Game 1>의 플레이어인가?’였다. 나는 무엇이었는가? 전시를 보는 이는 어떻게 플레이어가 될 수 있을까? 선택은 가능했다. 1. 나간다, 2. 본다, 3. 자거나 딴짓을 한다. 기타 등등.. 하지만 이 선택이란 일상에서 무수히 생겨나는 선택들과 일치할 뿐이다. 전시장에서 나는 ‘Game 1 속 아바타 A에 접속된 Game 1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 A(혹은 아바타 B)에 접속된 플레이어 B'였다. 아바타 A는 실제로 연산되는 게임과 상호작용하며 임무를 수행한다. 플레이어 A는 아바타 A를 조종한다. 보이스는 이 플레이와 중첩되어 다른 말을 떠들어댄다. 플레이어 A는 보이스의 침입을 받아 계속해서 끊긴다. 영상을 편집한 것은 작가 ’강정석‘이다. 그렇다면 이 사이에 다시 게임이 업데이트된다. 플레이어 A의 게임 플레이는 연산작용과 멀어지고, 메타데이터를 이용한 27분의 시간흐름 속에 갇혀버린다. 이것은 일종의 루프가 되어 계속해서 ’재생‘된다. 클리어란 없는 무한히 재생되는 <Game 1>을 플레이하는 것은 오로지 보는 경험으로만 가능하다. <Game 1>을 보면서 우리는 경험을 빼앗긴다. 하지만 다른 ` 채운다. 바로 <Game 1>을 방해하는 ’메타 데이터‘들이 말이다. 자동화로 인해 경험이 사라지고 관성적인 시대가 온다면 작가는 이처럼 ’무대‘와 ’간섭요소‘를 통해 매체의 가능성을 다시 보여준다. 


수평적 객체들의 작동


‘Game 1' 전시는 수평적 객체들이 병렬되어있다. 이 객체들은 두 장소에 나열되어있는데, 첫 번째는 ’무대‘인 전시장이며 하나는 <Game 1> 작업이다. 무대의 경우 전시장 전체가 단절된 경험을 위해 몇몇 사물로 배치되어있다. 이 상황안에서 ’매거진‘과 ’완전 공략집‘, ’사물들‘ 그리고 <Game 1>은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무대 안에 포함된 요소들을 수평적 객체로 인식하기 위해 요소 각각이 어떤 경험을 유발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공략집‘-’잡지‘-’플레이 영상‘-’전시 디자인‘이라는 다른 형태의 객체들은 같은 목적의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Game 1'의 내용은 ’공략집‘의 내용과 일치한다. 이 문서는 ’Game 1'의 플레이 영상을 관통해 나타나는 이미지로 표상된다. 그렇다면 <Game 1>이 일종의 기표가 되고, 공략집은 기의가 되는 것일까? 그렇다기에는 ‘공략집’을 따로 봤을 때의 경험 또한 다르다. 공략집이 읊어질 때 내용을 다 인식하고 기억할 수 없다. 결국, 추후에 문서화된 공략집을 꺼낸다. <Game 1>을 다시 본다. 뭔가 이상하다. 이 전시의 세 요소를 분석해보면 흥미로운 결과를 알 수 있다. 우선 문서들과 <GAME1> 그리고 전시자체는 하나의 표상체로 제시된다. 이때 세 표상체의 대상은 단일하다. 그 대상이란 바로 ‘게임’이다. 하지만 이 게임을 재현하는 방식 또는 게임이 표상체를 결정하는 방식에 따라 해석체가 달라진다. 동시에 해석체에 따라 우리의 경험은 달라진다. 따라서 단일한 목적(대상)을 가진 것들이 다르게 보인다. 각기 다른 표상체의 작동은 ‘게임’이라는 목적 혹은 대상을 다른 해석체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매거진‘이라는 매체는 여러 필자의 글이 함께 실려서 그런지 강정석 본인의 글만큼 다른 이들의 글이 중요해 보인다. 동시에 ’매거진‘과 ’Game 1' 그리고 '전시장‘은 다른 기호가 섞이지만 결국 ’강정석‘이라는 작가의 메타데이터를 기준으로 집결되는것이기도 하다. 수평적 객체들로 작동하려고 하지만 작가의 취사선택은 인식도는 형태까지 결정한다. ’Game 1'은 플레이 영상으로만 제시되고, 게임에 관한 글들은 ‘Game 1'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에 대한 해석들이다. 따라서 'Game 1'은 자립할 수 없어 보이고, 우리가 흔히 미술이라고 생각하는 관행상의 주요 작업이 되지 못한다. 영상은 뒤로 후퇴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다른 요소들이 왜 전시장에서 공개되는가를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Game 1' 때문이다. 이때 불능감을 줄이는 ‘공략집’-‘잡지’로 작가는 ‘물신감’의 흔적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리고 플레이 영상은 그 소실을 고발한다. 객체들의 수평성은 게임에서 무엇이 더 강렬히 인식되는가에 따라 경험의 축이 달라지듯 작업의 연속 선상에서 무엇을 중심으로 생각하는가를 묻는다. 솔직히 말해 나는 전시장에서 가져온 ‘도큐멘트’가 더 결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영상은 뒤로 후퇴한다.



<GAME I: Speedrun Any% PB>, 2016, HD, 27min (스틸컷) / 출처 : 두산 갤러리


<Game 1> 전시에서 '강정석‘은 단순히 한 개인전을 넘어 전시와 문서의 관계에 대해 재고하게 한다. 이 전시에서 제시된 문서들은 “여전히 전시를 보충하고 확장하는 추가적인 레이어로, 전시를 활성화하는 촉매로, 더 나아가 전시를 다른 전시나 심지어 미술 바깥으로 연계하는 생산적 출구”로 보인다. 동시에 이 문서들은 접근성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되는데, 그것은 게임에 대해 공유되지 못하는 나머지 부분을 채우기 위해 시도된다. 강정석이 전시장에 비치한 문서는 게임에 관한 문서인 만큼이나 시각언어를 번역해 제시하는 역할도 한다. 이때 이 문서들은 “단순히 정보를 물질화하는 것이 아니라 부유하는 다량의 정보를 제한된 크기로 거르고 안정화하며, 그럼으로써 인간 신체가 정보와 좀 더 유의미하게 만날 수 있는 특정한 제한적 상황을 형성한다. 요컨대 그것은 확장된 의미의 정보처리장치를 구성한다.” 문서에 포함되는 글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아감벤이 말하는 ‘불’과 ‘글’의 관계가 생각난다. 아감벤은 ‘신비’가 사라진 곳에 ‘문학’이, ‘불’이 사라진 곳에 ‘글’이 남는다고 말한다. ‘불’이라는 제례의 ‘신비’적인 요소는 우리가 게임 속에서 흔히 겪어내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게임은 현실처럼 구성단계를 알 수 없는 게아니다. 게임은 항상 현실성에 대한 욕망을 지니지만 그 불능감 때문에 미끄러진다. 따라서 게임은 그 세계를 돌파하기 위해 보조수단을 요구한다. 그것이 ‘글’이라면 게임에 관한 ‘글’은 세게의 불가능성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그것은 신비한 세계에 대한 사실적 허구성을 증명한다. 게임을 하면서 공략집을 볼 때 우리는 가상에서 현실로 빠져나오곤 한다. 공략집은 오히려 가상세계를 파괴하는 요소로서 게임의 옆에 놓이게 된다. 이 문서들은 게임의 신비로운 경험을 매끄럽게 하려고가용된다. 하지만 그 사용은 현실감각의 재고를 부르기 마련이다. 게임에 관한 글이 미술로서 제시되는 이상 이 글들은 미술에 대한 글로 사유 되어야 한다. 이때 ‘문서’는 스스로 예술이 되는 게 아니라 작업과의 관계에서 예술이 된다. 이제 우리는 전시에 보조되는 문서들을 일종의 공략집으로 사유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문서들은 작업 본연이 주는 경험을 차단하고 ‘대리-만족’에 그치게 할지도 모른다. 강정석의 작업은 게임이라는 형식을 통해 ‘대리-만족’을 매끄럽게 제시한다. 그렇기에 이 전시에서 문서와 영상은 수평적이게 된다.




전시전경 / 출처 : 두산 갤러리


강정석은 공략집과 매거진 둘 모두에 추가한 글 ‘주변기기의 게임’에서 비디오 게임을 향유하는 데 좀 더 현실적인 느낌을 위한 ‘주변기기’들이 발달했음을 밝힌다. 주변기기는 “불능감을 모니터 속에서 해결하거나 게임의 쌍방향성으로 현실과 가상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개발된다. 그러나 포터블 기기에서 스마트폰까지 일상이 된 순간에서 주변기기의 게임은 끝난다.” 작가는 ”현실과 분리된 가상의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권리“가 소실되었고, 가상으로 다시 이주할 수 있는지 묻는다. 이 글에서 작가가 주변기기의 계보로 밝히는 것은 ‘게임’이 단순히 하나의 개발로 끝나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 게임은 항상 접속할 수 있는 다른 요소를 가질 수 있게 발전해왔다. 그리고 오늘날 게임은 ‘사실적 허구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게임 속 다양한 요소가 ‘리얼리티’를 위해 집결된다. 그래픽, 타격감, 사운드, 배경, 내러티브 등등... 그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연결된다는 허상과 관련있다. 먼저 게임에 대한 기술적 거리감이 커진다. 동시에 게임이란 무엇이지 생각되지 않는다. 게임을 하는 순간에 중요한건 게임이 아니라 ‘보거나’, ‘듣는 것’이다. <Game 1>은 트레드밀 위에서 자꾸만 사라지고 나타나는 루프와 같다.


이 글에서 나는 강정석 작가의 ‘Game 1'전시에 대해 자동화되는 삶과 객체들의 수평성을 큰 줄기 삼아 이야기했다. 두 주제 모두 <Game 1>이라는 작업 자체를 집중해 말하지는 않는데 이는 전시자체가 요소들을 평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재의 게임에 대해 형식적으로 말하는게 <Game 1>이라면 공략집과 매거진은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며 현재의 게임형식을 공격한다.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시대의 문화적 생산물을 미술로 번역하는 행위다. 이 전시는 단순히 게임에 대한 미술이 아니다. 손 안에서 빠져나가는 수평적 객체들의 ’오토 플레이‘는 게임 자체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이 전시에서 밝히는 것은 더 이상 다른 세계로 단절되어 진입하는게 아니라 전 지구적 매핑에 의해 복제된 가상과 연결되는 감각이다. 작가는 이를 전시장이라는 전통적인 단절된 장소에 올려내서 동물적이고, 말초적인 반응을 재고하게한다. 강정석 작가는 본인이 관심있는 분야에서 시작해 한 사회를 진단하고자 하는가? 사실 진단이라기 보다는 다르게 인식하고 바라보기가 된다. 이를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서는 ’기초‘를 세우고, 키메라처럼 여러 이야기로 살을 붙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한 미디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사회적 기능을 두루 살피는 것은 힘들다. 강정석은 모든 게임의 역사가 아닌 최소화되가는 ’불능감‘과 그로인해 출현하는 ’자동화‘에 대해 집중한다. 모든 자동화는 인간의 손을 빼앗는가. 이때 우리는 “가상으로 이주할 수 있을까?”


by. 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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