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al Zones

새로운 지구 정치를 위한 인식법- PaintingScanning 사이에서

 

Critical Zone Observatory Space, 2018-2020, Alexandra Arenes/Soheil Hajmirbaba(SOC-Societe d'Objets Cartographiques/ atelier shaa), Mixed-Media-Installation, Videos, Modelle, Objekte, Masse variabel Produziert in Zusammenarbeit mit dem ZKM

 

독일 칼스루에의 ZKM에서 브루노 라투르와 피터 바이벨을 필두로 기획된 전시 ‘크리티컬 존’(Critical Zones)은 2020년 5월 23일부터 2021년 8월 8일까지 총 15개월의 긴 기간 동안 진행되고 있다. 이 전시의 부제는 ‘새로운 지구정치의 지평들’이다. 사실 이 전시가 주장하는 일련의 개념들은 예술학이나 미학적인 논의에서 출발하는 것이 전혀 아니며 오히려 지질학과 생태학의 새로운 연구 방법론을 비롯해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의 앙상블에 대한 말 그대로 새로운 지평을 개괄하는 시도로 읽힌다. 전시 자체에 대해서 논의하기 전에 기획주체들이 담아내려고 한 몇몇 개념들은 어느정도 상세히 설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제목이자 전시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 짓고 있는 개념인 ‘크리티컬 존’은 2001년 미국 국가연구위원회(이하 NRC: National Research Council)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1909년 Tsakalotos에 의해 화학 분야에서 도입되었고 이후에 지질학계에서 사용되었다. 1988년 이후 Gail Ashley는 이 ‘크리티컬 존’ 개념을 2001년에 공식적으로 사용된 의미에 가까운 ‘지구 표면의 얇은 지층’으로 정의했다.[1] NRC의 정의에 따르면 크리티컬 존이란 “암석, 토양, 물, 공기, 생물체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물질과 에너지 흐름이 일어나는 고체 지구와 유체 사이의 역동적인 경계영역으로서, 자연서식처를 조절하고 생명 자원의 가용성을 결정하는 불균질한 근지표환경”[2]이다. 더 일반적으로는 “지구의 근지표환경 중에서 캐노피층 상부에서 대수층 하부까지의 수직적 범위를 아우르는 영역”[3]으로 지칭된다. 두 정의에서 알 수 있듯 크리티컬 존 개념을 통해 연구자들은 인간을 포함한 비-인간 행위자와의 상호작용 과정을 단기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으로 측정하지만 않고 점진적인 과정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며 그 연구 범위를 근지표 환경의 수직적인 범위로 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브루노 라투르를 비롯해 전시를 기획안 이들은 곧잘 크리티컬 존을 쉽게 말해 ‘가이아’의 피부로 지칭한다. 이 피부위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은 라투르에 의하면 지구종 혹은 어스-바운드(Earthbaund)로 불린다.[4] 그리고 지구종에는 인간만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며, 생물체 비-생물체 혹은 인간 그리고 비-인간 행위자가 모두 뒤섞여있다. 그리고 이 피부위에서 벌어지는 상호작용의 과정들 속에서 이 전시는  그 관계를 단순히 과학적 연구의 일환으로 소급하지 않고 ‘새로운 지구 정치’를 꿈꾼다. 이 글에서 나는 이 전시가 담지하는 시도들의 이중적 측면에 대해서 조명하고 몇 가지 생각할 만한 화두를 건드리려 한다. 무엇보다도 ‘과학적 연구 주제’가 ‘미학적 경험’의 영역으로 어떻게 치환될 수 있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전시를 따라가며 읽거나 제시된 작품들에 대한 해석을 제공하지 않은 채 전시에 대해서 사유하려는 시도다.

 

Critical Zone Observatory Space, 2018-2020, Alexandra Arenes/Soheil Hajmirbaba(SOC-Societe d'Objets Cartographiques/ atelier shaa), Mixed-Media-Installation, Videos, Modelle, Objekte, Masse variabel Produziert in Zusammenarbeit mit dem ZKM

 

이 전시를 관람하는 대부분의 관람자들은 예술이나 과학 그 어떤 영역에서도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이들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전시는 일정 부분은 ‘새로운 과학 연구의 범위’를 교육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전시의 초입에서 벌어지는 황당한 경험이다. 전시장에 들어서게 되면 마치 설치작업의 모습을 하거나 영상작업인양 말 그대로 펼쳐져있는 ‘연구 결과’ 혹은 데이터들을 볼 수 있다. 각각의 연구활동은 상이한 영역을 다루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일반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전문적인 데이터’라는 점은 동일하다. 반대로 생각하면 일반인이 아니고 미학, 예술학 그리고 예술 경영학의 전문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도 전시의 초입에서 데이터를 해독할 수 없고, 이들에게는 오히려 이러한 정보들이 알레고리로 변화한다. 아니 차라리 여기서는 미학적 해석은 고루한 개념으로 변해버린다. 일반적으로 미술 작품이 가지는 관계성에서 핵심은 작품을 만드는 작가, 작품을 기획의 측면에서 포섭하는 기획자 그리고 작품을 해석하는 관람객의 상호작용은 미술 작품의 위상을 애매한 위치에 놓는다. 그리고 이러한 애매한 위치 속에서 작업은 지속적으로 환원되는 해석의 결과들과 관계맺는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우리는 ‘미학적 긴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구 데이터들은 일반적으로 관람객과 이러한 긴장을 만들어내지 못하며 단순히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숭고해보이는 척 할 위험을 가진다. 즉 관람객들은 전시의 초입에서, 정확히 말해 첫 번째 섹션에서 철저하게 좌절과 무력감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좌절감과 무력감은 전시를 보는 순간에 느껴지기보다는 전시 관람이 끝난 후에 데이터와 예술 작업을 마주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볼 때 엄습하기 시작한다. 만약 이 전시가 단순히 ‘크리티컬 존’의 연구 결과와 데이터를 나열한 고루한 전시였다면 바로 이러한 무력감만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전시는 바로 그 무력감과 좌절감을 통해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갈 원동력을 획득할 수 있다.

 

Critical Zone Observatory Space, 2018-2020, Alexandra Arenes/Soheil Hajmirbaba(SOC-Societe d'Objets Cartographiques/ atelier shaa), Mixed-Media-Installation, Videos, Modelle, Objekte, Masse variabel Produziert in Zusammenarbeit mit dem ZKM

 

어느 정도는 데이터와 도표에 대한 해석불가능의 상황은 의도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예술 작업과 실험 동향을 엮어놓는 형태의 이 전시에서 데이터, 도표와 예술 작업은 마치 N극과 S극 처럼 대칭점에 위치지어진다. 이 대칭적 관계는 라투르의 주장해왔던 개념에서 역설적으로 추론해낼 수 있다. 라투르는 이른바 인간-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를 구분짓는데, 이러한 구분은 행위의 정당성이 인간에게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서구 철학의 전통을 역전시키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술 전시’라는 독특한 분위기의 현장에서 인간-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가 가지는 ‘인간적인 과정의 소통불능’은 역시나 데이터와 예술 작업이 서로 상호교차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반복적으로 상기된다. 그러나 인간적인 소통가능성을 내려놓고 라투르가 주시하 듯 인간-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의 소통과정의 관계적 측면을 살펴본다면 작품과 데이터는 ‘크리티컬 존’이라는 개념을 각각 상이한 영역에서 정당하게 만들기 위해서 전시장에 위치지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미술과 과학 전문가가 아닌 이들에게 이 전시의 데이터와 작품의 비중은 중요하지 않으며 대부분에게 두 종류의 행위자는 시각적으로 관계 맺는다는 점에서 유사해 보일 뿐이다. 다른 한 편 전문가가 아니라도 자신의 경험의 척도에 따라 해독 가능성의 영역이 상이하다는 점에서 전시의 강도는 관람객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데이터-도표는 기름이고 예술 작업은 물로 보인다. 두 종류의 비-인간 행위자는 뒤섞이지 못한 채 겉돌 위험을 가진다. 그러나 전시안에서 기름으로써의 데이터-도표가 예술 작업의 문법에 따라 디스플레이 되는데, 바로 이 디스플레이 혹은 설치의 방법들이 일종의 유화제역할을 함으로써 ‘예술’ 작품과 ‘과학’ 데이터는 뒤 섞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뒤섞임 안에서 관람객은 초입에서 느껴졌던 해독 불가능성에서 초래된 무력감을 조금씩 회복할 수 있으며, 이러한 회복은 크리티컬 존 개념을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새로운 지구 정치’라는 맥락에서 지표면의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의 관계를 조명하는 작품들을 통해 가능했다.

 

미학적 경험의 측면에서 흥미롭게 제시할 수 있는 논의는 바로 ‘인식’ 개념과 관련된 것이다. 전시에서 제시된 대부분의 ‘예술 작업’들은 설치된 데이터-도표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인식-재현의 과정인 그리기(Painting)이 아니라 기계적 읽기(Scanning)를 통해 가능한 것들이다. 페인팅이 단순히 ‘회화’를 가리키기 보다는 대상을 파악하기 위해 혹은 재현해내기 위해서 인간-행위자가 2차원 평면에 대상을 재차 아로새기는 활동으로 해석한다면, 반대로 스캐닝은 인간-행위자가 대상을 가소성을 가진 형태로 파악하기 위해서 비-인간 행위자의 역능을 통해 파악(데이터 수집)하고 재현(모델링)하는 활동으로 읽힌다. 이 전시에서 기획자들은 Alexander von Humbolt의 지질학 연구와 관련된 자료와 도상 그리고 낭만주의자들의 자연과 관련된 회화작업을 함께 제시한다. 여기서 이 전시는 도상과 회화가 모두 그리기라는 제스쳐와 연관되어있고 이러한 제스쳐가 완전히 새로운 방법론으로 취급되는 기계적 읽기와 온전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행위자가 비-인간 행위자와 맺는 관계에 대한 접근법의 계보를 가지고 있음을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전시 디스플레이의 측면에서 이러한 시도는 낭만주의 회화가 모여있는 섹션을 지난 후에 관람자가 마주하게 되는 작업 <Double-Sided Immersion>으로 실현되어있다. 직접적으로는 그리기(Painting) 제스처의 결과물을 지나고 마주한 기계적-읽기(Scanning)의 자연을 이해하려고 하는 인간적인 시도의 각기 다른 시대적 방법론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리기와 기계적 읽기의 제스처 모두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에 따라 다른 결과물을 도출하는 접근법이라는 것이 그리기의 측면에선 과거의 지질학 연구 도상과 낭만주의 회화로 드러나며, 기계적 읽기의 측면에서는 연구-데이터와 동시대에서 제작된 예술작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Guido Philipp Schmtt, Ausbruch eines Vulkans, Leinwand, Ölfarbe, 124x92cm, 1893
Karen Holmberg/Andres Burbano, Double-Sided Immersion, 2018-2020, 4-Kanal-Videoinstalltion, Farbe, Ton, 6:06 Min, Maße variabel Unterstützt von National Geographic, produziert in Zusammenarbeit mit dem ZKM Kalsruhe
Karen Holmberg/Andres Burbano, Double-Sided Immersion, 2018-2020, 4-Kanal-Videoinstalltion, Farbe, Ton, 6:06 Min, Maße variabel Unterstützt von National Geographic, produziert in Zusammenarbeit mit dem ZKM Kalsruhe

 

이 전시의 예술 작품과 도표들을 통해서 주장되는 ‘새로운 지구 정치’는 무엇일까? 브루노 라투르가 전시를 위해 작성한 글에서 그는 ‘크리티컬 존’의 관점을 통해서 기존에 당연시되어온 개념들을 의문에 부친다. 국가와 국민이란 인간-행위자와 관련된 맥락에서만 합당한 개념인가? 비-인간 행위자들은 그 안에 포섭될 수 없는가? 이런 질문이 바로 ‘새로운 지구 정치’의 핵심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새로운 지구 정치는 기존의 삶의 형태에 대한 ‘관점’을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관점에서 권리, 자유, 재산, 책임 그리고 옳고 그름이 무엇이었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재차 질문된다. 이 전시에서 읽히는 몇 가지 개념을 살펴보면 ‘가이아’는 지구인 동시에 그 속에서 비-인간 행위자와 인간-행위자가 전체적으로 연결되는 환경이자 장으로 정의된다. 국민은 이러한 가이아에서 살아가는 인간종과 비-인간종을 포함하는 어스-바운드로 재정의된다. 따라서 자연스레 국가는 인간-행위자로서의 국민만 거주하는 곳이 아니라 어스-바운드로 재정의된 국민이 살아가는 곳이며 이 곳에서 정치는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어스-바운드를 위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활동으로 변화할 수 있다.

 

앞서 말한 ‘새로운 지구 정치’를 꿈꾸게하는 작업을 몇 개 소개하고 싶다. 첫 번째로 전시의 첫 번째 섹션을 지나 두 번째 섹션에서 마주하게 되는 Julian Charriere의 <Future fossil spaces> 작업으로, 이 작업은 리튬 에너지를 채굴하기 위해 소비되는 소금을 이용해 제작된 설치작업이다. 작가는 다양한 전시에서 소금-덩어리를 다양한 형태로 제시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기둥의 형태로 많지는 않지만 리튬 액체가 담긴 수조도 포함되어있다. 제목인 ‘미래 화석 공간들’은 인류세의 개념을 상기시킨다. 거칠게 요약해서 인류세가 인간의 활동 흔적을 지질학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시대라고 본다면, 학계에서 그 증거물들로 플라스틱, 닭 뼈 등의 축척물을 예로 들고 있다. 여기서 ‘소금 덩어리’ 혹은 ‘화석화 된 소금’도 같은 맥락의 증거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화석화 된 소금이라는 뜻은 ‘리튬 에너지’를 채굴한 뒤에 남는 소금이 더 이상 이용가치를 상실한 ‘무용한 것’으로 남으며, 이렇게 남은 것은 먼 훗날 인류세를 구분지을 때 지표로 삼을 만한 ‘화석’이 될, 즉 ‘미래 화석’으로서의 기능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아이러니한 미래-화석을 만들기 위해서 리튬-이온 건전지 제조업은 어마 어마한 양의 지하수도 소비한다. 실제로 칠레의 한 마을은 리튬 채굴로 인해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다. 리튬 에너지는 전기차 생산의 주요한 동력이며 소위 선진국이라는 곳에서 앞다투어 투자하고 있다. 환경을 위한 선택은 자국의 환경을 위해 타국의 생태를 파괴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는 파괴적 활동이지만 대부분 그 인과관계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끊어져 있어 은폐되어있다.

 

Julian Charriere, Future Fossil Spaces, Installation, Lithiumablagerungen und Salzklumpen, Maße variabel, Dittrich & Schlechtriem, Berlin Rick Collection, Studio Julian Charriere, 2017
Julian Charriere, Future Fossil Spaces, Installation, Lithiumablagerungen und Salzklumpen, Maße variabel, Dittrich & Schlechtriem, Berlin Rick Collection, Studio Julian Charriere, 2017
Julian Charriere, Future Fossil Spaces, Installation, Lithiumablagerungen und Salzklumpen, Maße variabel, Dittrich & Schlechtriem, Berlin Rick Collection, Studio Julian Charriere, 2017
Julian Charriere, Future Fossil Spaces, Installation, Lithiumablagerungen und Salzklumpen, Maße variabel, Dittrich & Schlechtriem, Berlin Rick Collection, Studio Julian Charriere, 2017

 

<Future fossil spaces>에서 자원과 관련된 신-식민지의 개념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반면에, ‘Uriel Orlow’작가의 <Soil affinities>작업은 바로 이러한 신-식민지 혹은 경제-식민지를 핵심 주제로 다루고 있다. 프랑스의 식민-제국 당시의 본토를 위한 식민지에서의 농산물 생산에 대한 실험들이 사진 자료로 제시되며 수집된 영상들은 오늘날에도 아프리카 세네갈에서 프랑스 회사가 어떻게 자국을 위한 ‘농산물’을 경제 식민지의 형태로, 즉 더 온건해 보이는 방식으로 생산해내는지 알 수 있다. 기존의 아프리카의 주식과 다르게 토마토, 파프리카 양파과 양배추는 아프리카에서 더 많이 생산되고 있으며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많은 유럽의 농업회사가 대부분 오직 유럽의 거대유통망을 위해서 작물을 생산하고 있다. 식민 시대가 종결된 1960년대 이후에 정말 ‘식민지’는 사라졌는지 혹은 다른 형태로 존속하고 있는지 이 작업은 작물과 인간 사이의 연결망을 통해 조명하고 있다.

 

Uriel Orlow, Soil Affinities, Mixed-Media-Installation, Holzboxen, Tapete, Archiv-Pigmentdrucke, 5 Videos, Maße variabel, Courtesy Uriel Orlow, Mor Charpentier, Paris, und ZKM Karlsruhe
Uriel Orlow, Soil Affinities, Mixed-Media-Installation, Holzboxen, Tapete, Archiv-Pigmentdrucke, 5 Videos, Maße variabel, Courtesy Uriel Orlow, Mor Charpentier, Paris, und ZKM Karlsruhe
Uriel Orlow, Soil Affinities, Mixed-Media-Installation, Holzboxen, Tapete, Archiv-Pigmentdrucke, 5 Videos, Maße variabel, Courtesy Uriel Orlow, Mor Charpentier, Paris, und ZKM Karlsruhe

 

탈-식민지 논의와 다르게 인간-행위자의 활동과 그에 대한 비-인간 행위자의 반응을 주제로 하는 작업은 바로 ‘Forensic Architecture’의 영상 작업 <Cloud Study>였다. 작품 제목의 ‘구름’은 단순히 하늘 위에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구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인간-행위자의 활동으로 만들어지는 연기-구름을 포함한다. 이러한 연기는 과거의 ‘석탄을 연소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연기’에서부터 많은 국가에서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사용하는 최루 가스(CS탄) 그리고 가자 지구에 발사된 수 많은 종류의 미사일에서 형성되는 연기를 비롯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향을 미치는 가스 테러까지 포함한다. 작업 안에서 이러한 구름-연기들은 인간-행위자의 행위의 과정이자 결과로 나타난다. 흥미롭게도 앞에서 내가 제기한 그리기(Painting)와 기계적 읽기(Scanning)의 문제가 이 작업에서 재차 통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정적인 형태로(이를 테면 정물로서) 가시화될 수 없다고 작업 내에서 정의된 구름과 연기는 ‘윌리엄 터너’를 비롯한 작가들의 회화에서는 그리기의 제스처를 통해서 상상력에 기반해 붙잡혀있으며, ‘Forensic Architecture’가 시도하는 구름의 시뮬레이팅에서는 기계적 읽기를 통해 계산을 통한 예측으로 손에 들어오게 된다. 결론적으로 구름을 연구함으로써 접촉에서 발생하는 흔적과의 인과관계가 직관적이지 않은 연기와 같은 존재-방식이 드러나며, 과거에 이러한 형상을 인간적 시각에 의존한 상상력으로 채워넣었던 반면, 구름-연기의 영향과 결과들을 기계적으로 읽어냄으로써 추후에 나타날 모호한 형태의 연기들에 대처할 가능성이 증대된다. 이스라엘군이 가자 지구에 발사한 미사일 중에는 미사일 본체에서 무수한 자탄을 추가로 발사하는 형식도 있었다. 이 작업은 이러한 발사 과정의 연기 생성을 역추적하고 그것을 시뮬레이션함으로써 추가적인 폭격에서 본체의 자탄들이 어떤 방향으로 퍼질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가늠한다. 결론적으로 구름을 연구하는 것이 항상 똑 같은 정도로 나타나는 절대적인 사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 환경과의 상호작용 사이에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인식, 측정 그리고 예측이라는 것이고, 작가들은 이러한 ‘구름’과 같은 것 중 하나를 바로 ‘기후 변화’라고 주장한다.

 

Forensic Architecture, Cloud studies, Videoinstallation(Farbe, Ton, 23:28 Min), Produziert in Zusammenarbeit mit dem ZKM Karlsruhe, und in Kooperation mit Bruno Latour
Forensic Architecture, Cloud studies, Videoinstallation(Farbe, Ton, 23:28 Min), Produziert in Zusammenarbeit mit dem ZKM Karlsruhe, und in Kooperation mit Bruno Latour
Forensic Architecture, Cloud studies, Videoinstallation(Farbe, Ton, 23:28 Min), Produziert in Zusammenarbeit mit dem ZKM Karlsruhe, und in Kooperation mit Bruno Latour

Forensic Architecture, Cloud studies, Videoinstallation(Farbe, Ton, 23:28 Min), Produziert in Zusammenarbeit mit dem ZKM Karlsruhe, und in Kooperation mit Bruno Latour

 

위의 세 작업을 비롯해 대부분의 전시 속 작업들이 전제로 하는 대주제는 전부 다르지만 인간-행위자의 활동과 그것이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명한다는 것은 동일하다. ‘미래 화석’이나 ‘농작물’ 그리고 ‘구름-연기’는 모두 인간적 활동에서 비롯되어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비-인간 행위자이며 ‘새로운 지구 정치’안에서 정의되는 바에 따르면 권리를 박탈당한 국민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전시에서 일반적 데이터들은 바로 이런 다른 어스-바운드에 대한 연구의 동향을 제시하며, 많은 경우 예술 작업들은 이 어스-바운드들이 어떻게 그 권리를 박탈당한채 인간-행위자인 우리에게 유린당해왔는지 보여준다. 화성으로 향하기를 꿈꾸는 자들과 달리 이 전시에서 우리는 우리가 밟고있는 이 지구, 가이아 위에서 어떤 문제가 야기되는지 인식할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논문이나 뉴스 기사로 읽었을 때 때로 상당히 모호하게 느껴지는데, 발생한 문제들, 이를테면 여기서는 대부분 기후문제들이 가지는 인과관계가 불명확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이터와 예술 작업의 앙상블로서 이 전시는 이러한 인과관계가 항상 ‘명확’하지는 않다는 것을 밝히며 그 관계성의 인식을 위해서 필요한 수단이 과거에 어떠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떠할 수 있는지 일련의 계보를 통해 제시한다. 즉 그리기(Painting)와 기계적 읽기(Scanning) 사이의 계보를 연결짓고 그 시도가 곧 모호한 대상에 대한 인간-행위자의 인식론적 접근 방법임이 명확해진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지구 정치를 위해서는 비-인간 행위자와 인간-행위자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 데이터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그 둘 사이의 상호관계에 필요한 상상력을 채워줄 예술 작업들도 요구되며, 이 전시는 그러한 비전의 한 경향으로써 구체화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 현윤정, 오일찬 『근지표환경 임계영역(Critical Zones)의 환경적 중요성과 환경 관리의 미래 이슈,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기초연구보고서 20160,, 4p

[2] Ibds, 4p

[3] Ibds, 5p

[4] Bruno Latour, über CRITICAL ZONES, https://zkm.de/de/bruno-latour-ueber-critical-z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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